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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한반도에서 남북전쟁의 내란이 일어났다. 28일에는 서울에 북한군이 진주하고, 정부는 대전·대구·부산으로 피란 남하하였다. 그에 따라 역사학자도 남하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서울에 남아 북한정권에 참여하였다가 평양으로 올라간 인정식·전석담 같은 사람도 있었는가 하면, 정인보·안재홍·손진태·이인영처럼 납북된 이도 있었다.
남하한 인사는 주로 임시수도 부산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전쟁중이어서 처음에는 큰 활약을 보일 수 없었다. 많은 인원이 대학에서 강의한 외에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와 해군전사편찬위원회에 종사하며 전쟁의 종식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가운데 젊은 학자들이 1952년 3월 1일에 발기하여 3월 16일에 역사학회를 결성했던 사실은 특별히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역사학회는 젊은 학자들이 발기하고 주도하였다는 점, 역사연구를 진단학회의 기성학자처럼 고증학에 머무르지 않고, 해석학 방법을 추구한다는 점, 그래서 당시에는 진보성을 자처하고 있었다는 점, 국사·동양사·서양사 연구를 총괄한 종합 연구학회로 출발한 점 등이 특징이었다.
그런데 1945년에도 역사학회가 결성된 바가 있었으므로 그와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52년의 역사학회 발기인은 한결같이 45년의 것과 관계가 없었다고 말한다. 문서상에서도 그런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창립 당시에 학회 이름을 정할 때, 한국 또는 조선 역사학회라는 이름을 논의한 듯하며 그러나 한국이나 조선을 붙이는 것에 대하여 정치성 때문에 거부감이 강했다고 증언하고 있는 것을 보면, 45년의 역사학회의 재건 같은 논의는 당초부터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45년의 조선역사연구회를 결성했던 이병도·김상기를 고문으로 추대하여 후원자 또는 보호막으로 장치하는 마당에, 이병도 등이 1945년 12월 12일 조선역사연구회 결성에 반발하듯이 13일 뒤인 12월 25일에 탄생한 45년의 역사학회를 재건한다는 기미를 보여서는 안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