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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중서(동중서)에서의 의와 리
『대종경』에 인용된 “그 의만 바루고 그 이를 도모하지 아니하며 그 도만 밝히고 그 공을 계교하지 아니한다(정기의이불모기리 명기도이불계기공)”라고 한 내용은 『한서』의 동중서전에 실려 있다. 『한서』, 동중서전에서는 의자가 의자로 되었으나 원의는 차이가 없다.
이 내용은 동중서(B.C 179-104)의 저서인 『춘추번로』에 바탕한 것으로서 『춘추번로』 가운데 「대교서왕월대부불득위인」이라는 글에서는 “그 공을 바루되 그 이를 도모하지 아니하며 그 이치를 닦되 그 공을 급히 세우려고 하지 않는다(정기도불모기리 수기리불급기공)” 라고 표현되어 있다. 이 두 가지를 비교해보면 『춘추번로』의 원문이 보다 온건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서 동중서전의 작자가 『춘추번로』의 내용을 조금 달리 표현하긴 했지만 대의에는 차이가 없다. 후세에는 의리정신이 보다 선명하게 드러난 『한서』 동중서전의 내용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동중서는 중국 전한 초기의 대표적 유학자로서 어렸을 때부터 특히 『공양춘추전』의 공부에 힘을 쏟았다. 경제시에 박사가 되었으며 무제시에 왕에게 등용되어 유학을 국가통치의 기본이념으로 확립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유학이 오랫동안 중국역사를 지배한 데는 동중서의 역할이 크게 작용하였다. 갈영진, 『중국철학범주사』, 흑룡강인민출판사, 1997, 314쪽.
한왕조 초기의 의리지변에는 진왕조 멸망의 역사적 경험이 축적되어 있었다. 한초의 유학자들은 진왕조의 멸망원인이 정욕의 지나친 발산에 있다고 보았다. 즉 진시황은 물질적 쾌락에 몰두하고 인의에 대한 관심이 없어 멸망했다는 것이다. 한초에 유학의 위치를 고양시키려 했던 육가는 “이욕의 문을 닫고 인의를 행할 것을(폐이문 행인정)” 주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