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그러나 우리는 우선 켈젠의 의도와 취지를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헌법을 준수해야 하는 실질적 근거에 대해 묻지만, 켈젠은 그 실질적 근거는 순수하게 법적으로 대답될 수 없는 성질의 것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켈젠의 문제의식은 현존하는 법질서의 존립근거는 법내재적으로 구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쩌면 그 결론은 켈젠의 그것처럼 “법은 지켜야 하는 것이다”라는 일종의 정언명령이 될 수밖에 없는지도 모릅니다. 이는 흡사 “우리는 왜 살지?”라는 질문에 대하여 “인생은 살아야 하는 것이다”라고 대답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이러한 켈젠의 입장이 나쁜 법체계에 대한 정당화를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는 인생에 대한 긍정이 나쁜 인생에 대한 옹호와 같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비추어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켈젠의 근본규범의 의미는 악법, 양법의 구별 이전에 법질서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우선 기본적으로 법준수에 대한 요청이 전제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켈젠이 자신의 근본규범을 어떤 실질적인 규범이라기보다, 전체 법체계를 인식하기 위한 “선험적·논리적 조건”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그런 관점에서 잘 이해됩니다. 법질서의 준수에 관하여 사람들은 보통 어떤 헌법을 준수해야 하며, 또 어떤 헌법은 거부해야 하는가라는 실질적 척도에 대해 생각합니다만, 켈젠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켈젠은 어떠한 법질서가 옳은지, 혹은 그른지에 관한 판정기준을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켈젠의 근본규범이론은 주어진 법질서에 관한 가치론이라기보다 인식론에 가깝습니다. 켈젠은 우리가 어떤 한 법질서를 가지려고 하는 한, 회피할 수 없는 규범인식의 전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순수한 인식론은 아닙니다. 법 자체가 인식보다는 의지에 친한 것처럼, 법의 근본적 인식은 곧 근본적 규범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법은 준수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