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임진왜란 후 그에게 계속 중앙의 벼슬이 내려졌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 속에서 1602년(선조 35) 그에게 대사헌이 제수되었다. 당시 서인이 물러가고 북인이 정권을 잡아, 선조는 그를 중용하려 했던 것이다. 그의 나이 68세 때였다.
이때 그는 다섯가지 ‘오불가사’의 조목을 들어 사직 차자를 올렸는데 그속에 이귀가 자신의 비리를 공격한 사실을 들고 또 편당이 혹심한 현실 때문에 대사헌직을 맡을 수가 없다고 하였다. 그는 잠시 임금을 만나고 나서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차자를 올렸던 것이다.
그에게 대사헌이 제수되었을 적에 서인 이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든 상소를 올렸다.
영남지폐 칙명위사인자 겁제수령 도류장살지권 개출기수 실정인홍위지창야……신인거도내소문 인홍호강종자지장 이관합천 추열기노……소위제처의병 조정개령파지 이인홍칙 자위기물 사감병사 막감하수
곧 정인홍이 의병활동을 벌일 적에 수령들을 마음대로 제어하여 형벌을 가했고 의병을 사병으로 키웠다는 것이다. 이에 정인홍의 문도인 문경호 오여은 등이 이귀를 논핵하는 상소를 올렸고 서인들도 이에 맞서 소동을 벌였다. 이렇게 해서 그는 새로운 적을 만나게 되었다.
1604(선조 37)에는 남명집을 그의 주도 아래에서 간행했다. 여기에 그가 서문과 행장·신도비명을 썼다. 그런데 행장 뒤에 『남명선생여이귀암 절교사』로 일컬어지는 부록을 덧붙였고 또 퇴계답이정서를 병록하였다. 이들 글은 이정이 조식의 행동과 처신을 두고 논단을 가하자, 이에 절교한 사실과, 또 퇴계·남명의 출처와 인품을 비교, 서로의 촌평 등을 적은 내용이었다. 이런 일들은 실제 두사람이 생존해 있을 적에 일어났던 일이요, 또 약간의 분란이 있기도 했었다.
이런 내용을 담은 남명집이 반포되자, 성균관 유생 정호성 등이 전국의 향교와 서원에 통문을 보내 정인홍을 규탄하고 나섰다. 이것은 내면에 깔려있던 두쪽의 알력이 표면화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춘추관의 사관은 이 문제를 두고 이렇게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