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성서의 희생양 개념은 발상이 다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해도 신과 사람 사이의 화해를 전제한다는 것, 희생양이 죄와 용서의 관계에서 규정된다는 것은 갈등의 직접적인 대상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희생자들에 대한 인간의 `무한책임`을 부각시킨다. 여기서 `무한책임`이란 `내가 한 것을 넘어선 책임성`을 의미한다. 무한책임은 과거와 현재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다. 미래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는 태도를 말한다. 우리는 인류가 저지른 과거의 역사적 범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또한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인류에 대하여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 그렇다면 무한책임의 근거는 무엇인가? 한스 요나스(Hans Jonas)는 `존재의 자기 목적성` 곧 `생명`에서 그 근거를 찾는다. `생명`은 비존재에 대한 존재의 명백한 대결, 즉 비존재에 대한 거부이며 생명의 긍정이기 때문에 한스 요나스는 책임을 존재하는 것과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 모두를 포괄하는 존재론적 당위로 이해한다. 존재론적 당위로서의 책임은 동시대의 공간에서만이 아니라 불확정적인 미래에까지 확대되고, 윤리적 정언(Imperativ)은 그러므로 인간의 행위가 지상에서의 진정한 인간적 삶의 지속과 조화되는 것, 인간 생명의 미래의 가능성을 파괴하지 않는 것에서 구체화된다.
타자와 자연에 대한 `무한책임`,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기 때문에 아무도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 종교의 인간관이다. 신과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이웃 인간, 자연과의 관계를 죄로 규정하는 것은 그러나 삶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화해를 필요로 하는 현실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한책임은 자신을 죄인으로 이해하는, 다시 말해 자신이 용서를 필요로 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 `우리 모두는 모든 것에 대해 책임이 있다. 모두 앞에 있는 모두에 대해 우리 모두가 책임이 있다. 그리고 내 책임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크다`는 의식을 가진 사람만이 질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