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이스라엘이 `주의 은혜의 해`를 축하할 것을 거부하였을 때, 예수는 시간의 충만으로 그 해를 이루기 위하여 왔다. 우리는 그것을 누가복음 4,17-21에서 읽는다. `그리스도를 통한 화해의 섬김`이 그때로부터 계속되고 보편적인 `주의 은혜의 해`로 재연된다. 고린도후서 6장에 기록된 바대로 지금이 구원의 날이다. 지금이 은혜의 시간이다. 그 `주의 은혜의 해`는 초대교회에 있어서 오순절 절기의 예배에 받아들여진다. 넘쳐나는 기쁨의 이러한 50번째의 날에 하나님의 모든 위대한 행하심이 찬양되었다. 그 단순한 50이라는 수는 `희망과 용서의 상징`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Athanasius가 말하는 것처럼 `모든 가능성 있는 것들의 구원`을 회상시키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모든 해방약속들의 처음 성취에도 우리는 이미 직면해 있었다: 모든 민족의 백성들에 대한 추수. 선교서인 사도행전은 Chrysostomus가 오순절 축연을 명명하는 바대로 `모든 축연들의 이러한 중심지`의 축제 때에 읽을 수 있었던 본문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매해 `주의 은혜의 해`를 맞이하였다. 이러한 낯설고 어쩌면 유토피아적인 그림이 우리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우리들이 그 `주의 은혜의 해`를 더 이상 영성화 (= 죄의 용서) 할 수 없는 한, 동시에 그것은 우리에게 무책임한 강단의 웅변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속죄와 축제는 화해의 양면을 이룬다.
우리는 이러한 희년의 축제를 현존하는 남북분단의 사실들(Fakten)에 대한 인간의 우상화에 반대하는 하나님의 저항의 구조화된 형태로서, 모든 객관화된 남북분단의 고정물들에 반대하는 저항으로서 이해해야 한다. 역사는 지울 수 있다! 과거는 행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어 질 수 있다. 아무 것도 여기에 최종적이지 않다. 그것 때문에 가난한 사람은 가난에 머물러야 한다고 판결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그것 때문에 부자는 현실적으로 토지가 한 분에게만 귀속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