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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작가들의 희곡 창작행위는 1920년대 이른바 `신극` 운동을 펼쳤던 연극인들처럼 연극운동을 실천화하고자 하는 의지면에서는 윤백남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만한 것은 아니다. 재일 조선인 유학생들에 의해서 발간된 {학지광}, 외국문예의 소개와 문학지망생들의 실험적 작품들의 온상지가 되었던 {태서문예신보}, 문학과 예술의 자율성을 설파하였던 동인지 {창조} 등에 실린 희곡들은 그 게재지의 성격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발표 당시 단 한 편도 공연화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극작가로서 공연화를 염두에 두고 썼다기보다는, 문학인으로서 그 표현양식의 하나로써 희곡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1910년대 후반에 창작된 일련의 희곡들은 지극히 私的이다.
그러나 10편도 채 안 되는 희곡들이기는 하지만, 기록문학으로서 희곡이 창작되었다는 것은 한국 근대극사의 중요한 지표라 할 수 있다. 종래와는 다르게 연극이 대단히 공적이라는 사실을 간파해버린 근대적 지식인들의 문학적 대응의 결과인 것이다. 희곡이라는 장르적 선택은 연극이 지니는 사회적 효용성 범주 내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으며, 이는 이후 연극인들의 장르적 인식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할 수 없다. 1900년대의 계몽담론은 이제 그 내포를 일정하게 바꾸어 식민지적 근대에 대한 자기 반영적인 모습을 희곡을 통해서 표출하기에 이른다. 흥미로운 것은 창작 희곡의 등장이 신파극이 융성기를 지나 쇠퇴의 길로 접어드는 후반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신파적 공간이 여전히 유효한 가운데 연극계의 한 모퉁이에서는 이미 그 공적 공간의 다른 가능성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