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두 입장 사이의 갈등은 4.3 위령제의 봉행 과정에서 현실적인 문제로 나타났다. 1991년부터 매년 4.3의 추도의례는 소위 우익진영인 `4.3 유족회`의 `위령제`와 진보단체인 `사월제 공준위`의 `추모제`로 각기 명칭을 달리하여 봉행되다가, 1994년에는 제주도와 도의회의 중재와 재정적 후원을 받아 `도민화합을 위한 범도민 행사`로 `4.3 희생자 합동위령제`가 처음으로 봉행되었다. 그러나 매년 합동위령제 봉행위원회가 구성될 때마다 해묵은 갈등이 재연되는데 1996년에는 `폭동`이나 `항쟁`이라는 `극단적인 용어`를 서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합의하에 가까스로 위령제가 봉행될 정도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합동위령제의 주관 단체가 반공유족회의 후예인 `4.3 희생자 유족회`인 사실은 아직도 4.3의 공식적 성격이 공산폭동에 머물러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4.3의 역사적 성격에 대해 서로 대립적인 해석을 취하고 있는 `폭동론`과 `민중항쟁론`은 4.3사건의 발발을 공산주의이든 민중적 민족주의이든 뚜렷한 정치적 목적의식을 가진 행동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는 점에서, 4.3을 좌우 이념갈등의 도식으로 보고있는 국가의 공식적인 담론의 틀에서 벗어나고 있지 않다. 4.3 민중항쟁론이 4.3당시의 민중의 행동을 국가폭력에 대항하는 대항폭력(reactionary violence)으로 해석한다면, 마찬가지로 공산폭동론은 국가폭력의 행위를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폭동에 대한 대응적인 폭력(counter-insurgency violence)으로 보고 있다. 두 입장 모두 폭력의 행위자의 입장에서 폭력의 불가피성을 공통적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폭력 자체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제기하지 않고 있다.
폭력의 정당성에 대한 도식적 해석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문제를 충분히 인식하고 4.3에 어떠한 명칭도 붙이지 않음으로써 4.3의 역사적 의의에 대한 담론을 활성화한 제3의 입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