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창조와 재창조, 두 개념은 미묘한 구별을 필요로 한다. 물론 공연예술은 창조적 작업이지만 전적으로 창조적일 수 없다. 물론 이것은 기보체계가 구비되기 이전의 공연예술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명령(injunction)일 것이다. 그러나 일단 기보체계가 구비되면, 창조의 여지가 있는 반면 동시에 작가의 명령에 순응(compliance)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 그 부분은 작품의 동일성의 근간이 된다. 소위 기보체계는 문법이라는 내재적 규약을 갖기 때문이다. 더구나 연출 자체가 연극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자신의 연출에 맞추어 텍스트를 개리멘더링 방식으로 조각나게 만들고 작품의 사지들을 잘라버릴 때 그 연극은 연출가의 것(창조)이지 원작 희곡의 공연 사례(재창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연출가의 독재성, 또는 자신의 유희본능를 충족시키려는 방향으로 달려나가는 것을 구이에는 “자신의 악마에 사로잡히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그러한 연출가는 종합예술로서의 연극의 중추인 다원적 일체성(diverse unity)을 말살하는 것이다. 특히 연출가가 텍스트 작가를 소멸시킬 때 문학의 창조와 무대의 창조라는 연극의 이중적 창조성을 말살시키게 된다. 그러면 무엇이 남는가? 연극은 사라지고 해프닝이나 이벤트 같은 것이 남을 것이다. 그것도 나쁠 것은 없다. 그러나 연극은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