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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문제는 공산혁명이 일어난 나라에서는 언제나 거쳐야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분배의 과정은 각 나라마다 다르게 나타나므로 중국의 경우 어떠한 과정으로 분배가 되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리라 본다.
토지분배의 문제도 크게 두 단계를 거쳐서 항일기의 공산당의 토지정책을 펴는데 기반을 이룬다. 광동꾜뮨기전 공산당과 손문과의 합작기간에는 토지의 균등분배의 원칙이 어느 정도 합의하에 있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공상당의 근본정책인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이 어느 정도 정책에 반영된 것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장개석이 정권을 잡고 있을 당시에는 반공정책을 통해 공산당을 억압했으므로 공산당은 그들에게 호의적인 세력을 규합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농민들에게 토지 정책을 선전하여 규합하는 정책을 폈다. 이러한 정책은 빈농이 다수인 지역에서는 상당한 호응이 있었으나 지주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지역에서는 불만의 요소가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단점을 인식하지 못한 공산당 지도부는 광동꼬뮨을 실행하기에 이르렀고 중국전체로 볼 때 공산당에 아군을 만들기보다는 국민당의 지도아래있는 매판세력과 쁘띠브르조아지들을 적으로 만드는 누를 범하고 말았다. 광동꼬뮨이 끝난 뒤 토지의 문제에서도 급격한 정책은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들을 많이 만들어 그 정책의 당위가 흔들리는 계기가 되었다. 정책에 대한 비판은 상대적인 토지정책을 나타나게 한다. 농민이 많은 지역에서는 토지의 균등분배를 직접실시하고 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지주들과 쁘띠브르조아지들을 수용할 수 있는 차별적인 토지 정책을 쓸 수밖에 없다. 이 당시의 차별적인 토지 정책은 항일 투쟁 당시에도 효과적인 민족규합 위하여 농민과 지주, 민족 브르조아지, 쁘띠브르조아지, 국민당세력들에 대한 차별적인 토지정책의 기반을 만드는 계기가 된다.
참고문헌
[1]:중국혁명의 전개과정, 중국사연구회 편저, 거름,p16
중국공산혁명이 성공한 이후에도 어느 정도는 농업이 중국의 경제를 지배하 고 있었다. 1970년 이후 등소평이 자본주의제도를 받아들임으로 해서 경제 의 공업화가 진행되었다.
Ref[2]: 광동꼬뮨사고, , p286-289
소련내부의 이념 분쟁이 스탈린을 궁지로 내몰자 그 해결책으로 중국내부의 혁명을 강조하여 반대세력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있어는 데 실제로는 트로 츠키를 위주로 하는 반대파가 중국의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의 혁명실패이후 스탈린의 비판은 트로츠키의 관점을 수용 한 면이 상당부분있었다.
Ref[3]:광동꼬뮨사고, , p301-302
일찍이 폭동직전인 1927년 12월 3일에는 `중국의 노동자, 농민이 새로운 혁 명적 고양에 직면하여, 전진하고 있는 것을 의심하는 것은 비겁자들 뿐이 다.`고 연설하여, 아직은 중국혁명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던 스탈린은 돌연 태도를 바꾸어 본문에서와 같은 결의문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Ref[4]:중국혁명운동문헌사, 존 K. 페어뱅크등, 풀빛출판사,p175
광동꼬뮨이 실패로 끝이 난 후 토지 정책은 변화한다. 다음의 두 가지다 그 런 정책의 변화를 설명한다.
(1)토지의 균등 분배 슬로건을 지지함과 동시에 비판해야 한다.
사유재산 제도의 직접적인 타격을 가하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2)토지의 균등분배를 중농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지역에 강제적으로 적 용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이면은 상당수 중농의 이해와 결정적으로 배치될 것이므로 이를 그들에게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판단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