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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혁명은 역사극 1)해서파관(해서파관)`의 비판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권력에 욕심을 갖고 있는 강청(강청), 강생(강생)등에 의해 유도되었다. 모택동은 `해서파관`에서 해서의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높이 평가하였으나, 강생은 `해서파관`에 대한 반응이 문제가 있고 여산 회의와 관계가 있고 팽덕회까지도 관련이 있다고 하면서 `해서파관`에 대한 비판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모택동의 동의하에 `해서파관`에 대한 비판이 시작되었고, 비판의 글이 신문에 실리게 되자 오함을 둘러싼 2)삼가촌(삼가촌) 그룹에게까지 영향이 미치게 되었다. 중공 중앙은 1966년 5월 4일부터 26일까지 북경에서 유소기(유소기)의 주재로 정치국 확대회의를 소집하였다. 이 회의에서 임표, 강생 일당들은 팽진, 육정일 등을 반당집단이라고 무고하고, 또한 그들에 대해 비판투쟁을 전개하였다. 또한 5월 16일의 회의에서는 모택동이 기초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통지`, 즉 516 지시를 통과시켰다. 이 통지에서는 각급 당위원회에 대하여 모택동의 지시에 따라 당과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이른바 학술 권위지들의 반동적인 자산계급 입장을 철저히 분석하여 학술계, 교육계, 신문계, 문예계 그리고 출판계의 자산계급 반동사상을 철저히 폭로하고 비판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비판당하는 자산계급의 대표자중 일부로 유소기와 등소평(등소평)이 지목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결과로 문화혁명소조가 성립되었다. 이후 문화대혁명이 전개되어야 할 방향이 불확실해지자 모택동은 유소기와 등소평에 대한 비판으로 방향을 잡아갔다. 또한 문화혁명소조는 `무산계급 대혁명에 관한 결의`, 즉 16조를 통과시킴으로써 당내의 자본주의 길로 가는 당권파를 정리하고, 반동 우파를 철저하게 고립시키려 하였다. 이로써 유소기, 등소평뿐만 아니라 중앙 지도급 인물들이 대거 심사 또느 비판을 받게 되었다.
참고문헌
1. 중국당대 40년사 ( 1949 ~ 1989 ), 신승하, 고려원, 1996
2. 중국현대사, 신승하, 대명출판사,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