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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작림이 피살되고 장개석과 장학량이 연계한 후 만주에서도 일본상품 배척과 제국주의적 이권회수운동이 격화하였다. 또한 대공황으로 만주철도포위선 건설계획은 만주철도를 위협하게 되었다. 일본국내에서는 이것을 <만·몽(만몽)의 위기>라고 선전하고, 31년 7월의 완바오산사건(만보산사건), 나카무라대위 사건과
더불어 배외주의 고양에 이용하였다. 관동군내에서는 이미 고급참모 이타가키 세이시로대령을 중심으로 <만몽영유계획>이 입안되어 있었다. 관동군은 1931년 9월 18일 밤 10시 반 펭텐 교외의 류타오거우에서 만주 철도를 폭파하고 이를 장학량의 군대의 행위라는 구실로 군사행동를 일으켰다. 관동군은 장학량의 군영인 북대영(북대영)과 펑텐성을 공격하였고, 이튿날 펭텐시를 비롯하여 만주철도 연변 주요 도시를 점령하였다. 또한 지린으로의 출병, 9월 21일 조선군 사령관 하야시 센주로 중장에 의한 조선군의 독단 월경으로 전화(전화)는 남만주 전체에 확대되었다. 일본정부는 군사행동의 전당성과 금후의 불확대방침을 발표, 사건을 공인하였다. 1931년 10월 진저우 폭격등 남만주를 점령한 후 관동군은 북만주 점령을 꾀하여 11월에 치치하얼 점령에 이어, 32년 2월 하얼빈을 점령, 이후 북만주의 주요도시를 점령했다. 당초 만몽을 영유하려고 계획했던 관동군은 만주 지배방식을 괴뢰국가 수립으로 변경했다. 1931년 10월 <만몽공화국 통치대강안>을 작성, 통치방침· 정부조직을 결정하고 각지의 군벌군에게 지역적 독립정권을 세우도록 하였다. 그리고, 11월에는 천진에 망명 중이던 부의를 탈출시켜 새로운 국가의 원수로 삼으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