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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책을 집정자 최우와 그 추종자들이 일방적으로 추진 결의하게 하고 또 그 명분을 확보할 수 있었던 데는 몇 가지 배경이 있었다.
첫째 몽고가 고려에 대해 보여준 고압적 태도와 무례한 행동이 고려의 반몽의식을 자극시킨 점을 들 수 있다. 고종 6년 강동성 전투로 인한 여몽 관계 성립 직후 몽고 사신 등은 융복(융복)에 무장도 풀지 않은 채 전상에 올라가 왕의 손을 잡고 문서를 전달하는 등의 무례한 태도를 보였고 이러한 태도는 1차 침략 이후 여전히 계속되었다. 몽고의 방자한 태도는 애초 고려가 몽고에 대해 가지고 있던 ‘몽고어이적최흉한’ 이라 한 극악한 선입관을 확신시켰고 그로 인한 자존심의 손상은 고려의 반몽의식을 강화시켰다.
둘째 몽고의 지나치게 과중한 경제적 징수를 들 수 있다. 여몽 관계가 성립된 이후 저고여 살해 사건이 일어난 고종 12년까지 공물 징수를 위한 사신이 매년 수 차례 파견되었고 1차 침략 이후에도 막대한 경제적 징수가 일방적으로 요구되었다. 그 내용을 보면, 고종 8년의 경우 수달피 10.000령(령), 세주(세주) 3.000필, 세저(세저) 2.000필, 면자(면자) 10.000근, 용전묵(룡전묵) 1.000정, 필(필) 200관등 막대한 공물을 요구하였는데, 이는 고려에게는 과중한 부담이었다.
세째 몽고의 고려에 대한 요구가 단순한 공물의 징수에서 끝나지 않고 군사의 조달과 같은 인적 자원에 까지 미침으로써 고려를 압박했다는 점이다. 몽고는 그들의 정복사업에 필요한 조정군(조정군)을 파견하여 줄 것과 왕족 및 대관의 동남,동녀 각 500 명씩을 인질로 보내고 공장(공장), 자수부인(자수부인)을 징발하여 줄 것도 강요하였다.
네번째는 1차 침략 이후 몽고의 고려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의 강화로 인한 점이다. 고려와의 강화 직후 몽고는 고려의 군사적 요지인 북계의 제성에 대한 72인의 다루가치를 설치하여…
네번째는 1차 침략 이후 몽고의 고려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의 강화…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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