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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대에는 과거에 변지로 여겨졌던 서남 연해·도서지역중 일부가 더 이상 변지로 간주되지 않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대신 17세기말 이래로 황해·경기·충청 등 서해 연해·도서지역에서의 해방체제 구축문제가 새로운 과제로 떠오르면서 이곳이 변지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호란 이후 국가의 방어태세는 서북지역으로 모아졌고, 그곳에서 변지의 범위는 점차 구체적으로 적용되기 시작했다. 호란 이후 조선은 이제 청이 오랑캐국가라는 그들의 숙명으로 인해 멀지 않은 장래에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퇴각할 청과의 일전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숙종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청의 예상 경로에는 양덕-맹산의 평안도 내륙지역과 함경도 전역이 포함되어 있었다.
영조대에 들어서서도 영고탑 회귀설은 여전히 맹위를 떨쳤지만, 퇴각하게 될 청의 경로는 평안도 강변칠읍과 함경도 삼수·갑산과 육진지역으로 좁혀져 있었다. 이것은 적유령산맥 중심의 방어체제를 공고히 하고 의주대로에 방어용 수목지대를 조성한 결과였다. 예상된 방어선을 중심으로 서북지역은 변지와 내지로 구분되었다. 조선전기에 비교적 포괄적으로 적용되던 내지(內地)의 용례도 평안도 강변, 혹은 함경도 북로와 대비되면서 분명하게 자리매김되었다.
전란의 위기감이 영조대 중반경을 고비로 서서히 극복되어 가면서 서북지역 변지의 범위에도 변화가 생겨났다. 변지 명칭은 기존의 변지 지역을 넘어 탄력적으로 적용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변지가 확대된 것이 아니라 지역적으로 고정된 변지의 개념이 해체되어 나감을 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