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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말17세기초 임진왜란 때와 그 직후에 조선왕조는 통치력이 극도로 약화되어 울릉도독도를 돌볼 여력이 없었으며, 이 시기 울릉도는 왜구들에게 노략질을 당하였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은 그 사정을 잘 말해준다. `..... 임진왜란 이후 사람들이 들어가본 일이 있으나 역시 왜의 분탕질을 당하여 정착하지 못하였다. 근자에 들으니 왜노 가 기죽도를 점거했다 하는데, 기죽도라고 혹 말하는 것은 곧 울릉도이다.` 임진왜란 이후 울릉도에는 조선인들만 밀입하거나 출어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인들도 출어하거나 밀입하여 고기를 잡고 나무를 도벌하는 형편이었다.
이무렵 1614년(광해군 6년) 6월에 대마도주는 조선 동래부에 서계(일종의 외교문서)를 보내면서 `도꾸가와 이에야스 ()의 분부로 죽도(울릉도)를 탐견()하려고 하는데 큰 바람을 만날까 두려우니 길 안내를 내어달라`라고 하였다.(변례집요 울릉도 조). 이에 조선정부는 예조에서 이를 거절하는 회유문을 주어 돌려보냈다. 이어서 조선조정은 그해 9월에 비변사의 건의에 따라 울릉도가 조선에 속한 사실이 동국여지승람에 실려있고, 또한 도민()을 소환환 기록도 명백하게 있으므로, 앞으로 이런 일본측의 같은 시도가 있으면, 이러한 모든 내용 과 함께 대마도주에게 강 경한 내용의 서계를 주어 막부에 보고하도록 돌려보내고, 울릉도에 일본인의 왕래를 금지 하도록 경상감사와 동래부사에게 지시하였다.(광해군일기. 광해군6년9월 신해조)
조선조정, 공도상태에 있더라하더라도 외국의 왕래 용납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