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신라 내부에 쿠데타 세력이 있어서 이들과 손을 잡은 견훤이 몰래 쳐들어 왔다면 경애왕과 그의 추종세력들이 이 사실을 몰랐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경애왕이 죽은 다음 견훤에 의해 왕이 된 김부는 경애왕의 시체를 서당에 안치하고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통곡하면서 장사를 지냈고, 고려의 태조가 사자를 보내어 조제하였다. 견훤과 손을 잡은 쿠데타 세력이 있었다면 이 세력은 김부와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김부를 중심으로 한 쿠데타 세력은 죽은 경애왕을 통곡 속에 장사지내지 않았을 것이고 고려의 태조가 조제했을 리도 없다. 따라서 그 당시 신라 내부에 쿠데타 세력이 있었을 가능성은 없으며 견훤이 쳐들어 오는 것을 경애왕이 미리 알았을 가능성이 높다
둘째는 견훤이 경주로 침입해 들어 온 때가 음력 11월이었다는 점이다. 경주가 아무리 남쪽에 위치해 있다고 하더라도 음력 11월은 야외에서 음주가무를 즐기기에는 적절한 시기가 아니다. 아무리 경애왕이 주색잡기에 빠져서 방탕한 생활에 탐닉해 있었다고 하더라도 추운 한겨울에 그것도 적군이 코 앞까지 쳐들어와 있는 상황에서 야외에서, 그것도 비빈과 종척들을 모두 데리도 음주가무를 즐겼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리고 경애왕이 국가적인 위기 상황에서 음주가무만을 목적으로 한 연회에서 놀이를 하였다면 국가가 패한 것에 대한 모든 책임이 그에게 전가되었을 것이다. 이 경우에 경애왕을 애도 속에 장사지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포석정이 음주가무를 즐기는 연회장소가 아니었다면 ‘연오’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숨은 뜻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무릇 국가를 몰락의 경지로 몰고 간 왕들은 정사를 돌보지 않고 주색에서 헤맨 사람들로 묘사되는 것이 역사의 일반적이 예이다. 백제의 의자왕이 그랬고 신라의 경애왕이 이 부류에 속하는 왕이 아닌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