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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수화는 우리의 자생적 가정수화와 유입수화를 기층으로 형성되었는데 조어론적으로나 이용환경에서 초기의 눈부신 실적을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고유 수화어의 조어나 수화강습회(知賢芳之助)를 통한 이용확산은 물론 수화통역 공식 기록(濟生院盲啞部, 1938)등은 이러한 실태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따라서 20년대 말에 이르는 이 시기는 일제강점기임에도 불구하고 가히 한국수화 이용의 황금기에 속했던 것으로 평가하여 손색이 없을 것으로 생각되는 것은 수화에 대한 인식이나 교육방법(手話敎育)을 통해 볼 수 있는 바로 그러하다.
30년대 이후 수화에 대한 조직적이고도 정략적인 탄압이 일본을 시작으로 우리에게 확산됨으로써 한국수화의 이용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이미 20년대 말 농아인들을 대상으로한 학교 교육에서의 「청음(聽音)」에 의한 일본어 교육이 더욱 강화됨으로써 그것은 학교에서뿐만 아니라 어용단체나 다름없었던 협회(朝鮮盲啞協會, 1921년 創設)를 통한 농아인 사회에도 상당한 영향을 행사하게 되었을 것임을 추정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오늘날 한국수화에서의 전통적 수화의 존재를 인정치 않으려는 논의의 근거는 이미 예서 비롯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수화의 탄압을 전제로 하는 일어의 주입은 광복 이후의 「구화주의」에서도 이념적으로 답습됨으로서 70년대에 이르는 한국수화의 황폐기를 빚어내기에 이른 것이다. 따라서 장애 극복을 명분으로 하는 재활 패러다임은 수화를 중심으로 하는 농아인 복지를 오히려 후퇴하도록 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에서의 수화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TC보급의 국제적인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고 하겠는데, 이렇게 되기까지는 특히 일본에서의 수화보급 확산 추세에 힘입은 바 컸다. 1981년 개설된 「수화교실」은 수화보급의 기폭제가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