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1) 민족 문제의 본질
저물어가는 20세기는 인류사에서 가장 커다란 변화를 겪은 격동의 세기로 기록되었다. 20세기의 가파른 고빗길을 넘어온 우리 민족사도 예외는 아니다. 19세기 말 부터 시작된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과 식민지 전락의 역사, 외세에 의한 국토 분단과 전쟁의 참극, 분단체제의 장기화·고착화로 엮어졌던 금세기의 시공간은 이 민족에게 비극과 고통을 강요해온 역사였다. 장준하의 표현을 빌리면, “세계사의 시궁창이 이리로 흘러들어 왔고, 세계의 모순, 세계사의 범죄가 이 땅을 무대로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강요된 비극과 고통의 반대쪽에는 그것을 거부하고 새 시대를 향한 건설과 창조의 운동이 이어졌다. 20세기는 민족의 운명을 지키려는 민중들의 끈질긴 항쟁이 분출되면서 삼천리 강토를 피와 눈물로 적신 시대였다. 천신만고의 협곡을 뚫고 우리 민족사는 지금 그 격동의 세기 끝머리에 와있다.
민족적 실체의 생활길에는 흥망성쇠가 주름잡혀 있다. 한때 강대·번영했던 민족이 차츰 쇠락의 길로 밀려나고 자취도 없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던 몰락사를 찾아보는 것은 그리 힘들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은 융성·번영의 길을 가고 있는가, 아니면 쇠망·퇴락의 길에 들어서고 있는가? 이 원색적인 물음에 딱 떨어지는 답변을 얻는 것은 뒷날 역사가들에게 미루더라도, 뒤로 미룰 수 없는 당면 문제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분단 현실이다. 주변 열강들이 맹수처럼 달려들어 물고 뜯고 하던 20세기 전반부에 일어났던 식민지 분할·강점기의 비극이 걷히고 해방된 강토에 새 나라를 세웠건만, 그 나라는 온전한 나라가 아니라, 남북으로 갈라진 반쪽 나라였다. 하나의 민족적 실체가 반쪽짜리 분단 현실에 갇혀 둘로 쪼개어지니, 민족의 실체와 역량이 둘로 분열·약화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