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정약용의 실학은 결국 ‘바른 정치’를 구현하기 위한 학문적 접근이었다. 이때 바른 정치란, 토지 없이 빈한하게 사는 일반 백성들을 돌볼 수 있는 것이라야만 했다. 전호 농민을 신분적으로 지배하며 고율의 소작료를 수취하였던 지주제의 모순을 지적하였으며, 따라서 지배 신분층에 속해 있던 양반 지주층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자영농 및 전호 농민의 요구를 반영하는 개혁안을 모색한 것이다. 이렇게 마련된 그의 토지개혁론은 다른 실학자들의 주장에 비해서 구체성을 띠고 있었다는 점에서 주목할만 하다.
백성을 돌보지 않고 억압과 수탈을 일삼는 양반 관료들의 비행을 지적하는 데에도 힘을 기울였다. 백성이 목민자를 위하여 있는 것(민위목생)이 아니라, 목민자가 백성을 위하여 존재한다(목위민유)는 입장에서였다.(『여유당전서』 1집 권 10, 원, 원목) 정약용은 관찰사를 일러 ‘큰 도적’이라 하였다. 당시 군현제 지배구조하에서 삼정(삼정)의 조세 수탈을 일삼았던 지방관들을 고발한다는 뜻이다. 특히 당시의 관찰사들은 곡식을 판매하고 부세(부세)를 도적질하는 장본이라고 지적하였다. ‘이 도적은 야경(야경) 도는 사람도 감히 따지지 못하고, 의금부(의금부)에서도 감히 체포하지 못하고, 어사(어사)도 감히 공격하지 못하고, 재상(재상)도 감히 말하지 못하며, 그래서 멋대로 난폭한 짓을 해도 아무도 감히 힐문하지 못하고, 전장(전장)을 설치하고 많은 전지를 소유한 채 종신토록 안락하게 지내지만 아무도 이러쿵 저러쿵 헐뜯지도 못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같이 큰 도적을 제거하지 않으면 백성이 다 죽을 것’이라는 표현을 쓰기까지 했다.(『여유당전서』 1집 권 12, 논, 감사론) 19세기 들어 상품화폐경제가 발전하는 가운데 중앙 및 지방관부의 조세 수탈이 가중되었으며, 그러한 가운데 농민층의 분화가 더욱 촉진되었던 시대적 상황을 우려한 것이다. 부세제도의 운영을 둘러싼 지방관의 부당한 중간 수탈에 대해서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고 그 방지책을 모색하였다.
참고문헌
홍이섭, 『정약용의 정치경제사상 연구』, 한국연구원, 1959.
고병익, 「다산의 진보관 -그의 기예론을 중심으로-」, 『효성조명기박사 화갑기념 불교사학논총』, 1965.
김용섭, 「18,9 세기 농업실정과 새로운 농업경영론」, 『대동문화연구』 9, 1972; 『증보판 한국근대농업사연구』 상, 일조각, 1984.
박찬승, 「정약용의 정전제론 고찰 -≪경세유표≫ <전제>를 중심으로-」, 『역사학보』 110, 1986.
김용섭, 「조선후기 토지개혁론의 추이」, 『동방학지』 62, 1989; 『증보판 조선후기농업사연구』 Ⅱ, 일조각, 1990.
조성을, 「정약용」,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 상, 창작과비평사, 1994.
정석종, 「정약용과 정조·순조 연간의 정국」, 『조선후기의 정치와 사상』, 한길사, 1994.
신용하, 『조선후기 실학파의 사회사상연구』, 지식산업사,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