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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현상학과 유식이론을 대비시킬 때 항상 부딪치게 되는 문제는 유식론은 아집으로부터의 해방인 반면에, 현상학은 의식을 세계구성의 절대적 단초로 우위에 두는 일종의 아집의 이데올로기가 지배한다는 사실이다. 유식론은 식의 전변에 의해 일그러지기 이전의 진여의 얼굴을 회복하려는 자기해탈을 목적으로 삼는 데 반해, 현상학은 선험적 자아에 의한 세계구성이라는 표제하에서 선험적 자아의 절대성을 강조함으로써 이 자아 역시 묘유에 지나지 않음을 파악하지 못하는 자기집착의 길을 간다. 말하자면 후설의 선험적 환원은 자아에 대한 집착을 위한 방편일 뿐이라는 해석이 통상적이다.
이와같은 형식적 대비는 후설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에서 비롯된 어슬프고 강압적인 짝지움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다음의 사실에서 확인될 수 있다. 먼저 선험적 자아에 의한 생활세계의 구성이라는 현상학의 근본착상은 근대적 사유, 즉 아집과 법집에 묶여 있어서 근원적인 알라야식을 읽지 못하는 주관주의의 산물이다는 해석은 후설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후설에 있어서 `구성`이란 주관에 의한 대상산출이라는 칸트적 구성이 아니다. 현상학적 구성은 잠재되어 있는 지평에 혼을 불어넣는다 혹은 현재적인 것으로 드러내어 회복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생활세계의 구성은 근대적 사유속에서 망각된 생활세계의 회복을 겨냥한다. 이것은 차라리 하이데거의 내맡김(Gelassenheit)에 가깝다. 즉 세속적인 일상세계에 붙들리지 않고 혹은 개의치 않고 근원지평인 생활세계에로 내맡기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런 의미에서 후설은 이미 하이데거의 존재사유속에 그 주-객 초월의 사유를 심어주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