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대동아 공영권’의 이념과 실천
사사카와 료오이치가 본격적으로 우익 활동을 벌이게 된 것은, 1931년 3월 오오사카 정우회(政友會) 원외단에 의해 결성된 우익 단체 국수대중당(國粹大衆黨)의 고문으로 추대, 9월에 총재가 되면서였다. 이 때 그의 심복으로 활약한 인물로는 후지 요시오(藤吉男)와 요시마츠 마사카츠(吉松正勝) 등이 있었다.
일본주의를 지도 정신으로 표방한 국수대중당은 우익 단체 중에서도 이색적인 존재였다. 무솔리니의 숭배자임을 공공연히 표방했던 사사카와는, 이탈리아 파시스트당을 모방해서 당원에게 흑색 국방복을 착용케 했다. 기관지로는 국방사 시절을 계승해서《국방》을 계속 발간했고, 전위대로 ‘국수정신대’, 외곽 단체로서는 ‘국수의용비행대’를 결성하여, 23개 지부, 1만 5천의 당원과 20대의 자가용 비행기까지 갖추고 왕성한 활동력을 보였다. 행동 우익으로서 폭력단적 성격이 농후한 국가주의 단체였다.
사사카와는 1931년 만주 사변이 발발하자 곧 군수 산업체인 ‘국수 광산’, ‘일본 광업’ 등의 주식을 매점하고, 사장・감사역에 취임하는 등 투기 활동에 나서는 한편, 이듬해에는 ‘국수대중당’에 ‘국수의용항공대’를 설립하고 ‘1인 1기 1함 격멸주의’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이 구호가 ‘카미가제(神風) 특공대’의 창설로 이어진다는 지적도 있다.
1933년에는 자신이 거느리는 인력과 자금으로 오사카에 일본 최초의 민간 ‘방공 비행장’을 건설해 제국 육군에 제공하기도 했다. 육군 장관 토오조오 히데키(東條英機)의 감사장이 뒤따랐다. 스스로 무상 헌납했다는 주장과는 달리, 코다마의 GHQ(연합군 총사령부) 심문 조서에는 “당시 그는 육군으로부터 대금조로 십만 엔을 받았다. 그러나 그 중 극히 일부만 군 관계자에게 썼을 뿐, 대부분은 자신의 호주머니에 넣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