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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구정동에는 외국 것이 금방 들어온다. 실제로 일본의 문물이 일주일이면 위성 방송을 통해,
잡지를 통해, 직접 건너오는 사람들을 통해 쉽게 새것이 전해 온다. 세계 여러 나라의 첨단적
소비재와 감각적 패션이 이곳에 다 몰려 있다고들 한다. 그런데 도시 중심으로 재편되는 듯한
세계 규모의 자본주의 체제는 이러한 공간을 곳곳에 창출해 놓고 있으며 문화적 혼합과
혼성의 상황을 초래하였다. 지금 우리가 `우리`의 `본질적`인 것을 고수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뉴 키즈 온 더 블럭>을 보고 환호하는 것보다 <서태지와 아이들>을 보고
환호하는 것이 낫다`고 하던 어느 교수의 이야기는 순진한 이야기인 것 같지만 일리가 있다.
`우리`를 이야기하려면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들의 모습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이미
서양화될대로 서양화된 우리를 놓고 서양화되지 않은 어떤 `고유한` 우리를 찾아보려 한다면
긴 식민지적 상황을 겨우 빠져 나온 우리는 또 한번 우리를 소외시키고 말게 될 것이다.
복고적 민족주의에 빠져 제자리걸음을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뉴 키즈`와는 왕래가 없지만 서태지와는 만날 수 있고 또 많은 또 다른 서태지를 만들
수 있고 그런 가운데 새로운 서태지를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지역성에 주목해 보자. 서태지가
제기하는 기호는 우리들의 일상적 삶 속에서 우리들에 의해서 사용되고 변화될 수 있는
부분이다. 새로운 창조를 위해서는 제대로 된 모방가가 필요하고 서태지와 같이 `무분별한`
모방가도 필요하다. 대중 문화를 변화시키려면 그것을 공략하면서 동시에 그 속을 파고드는
이중 전략을 써야 하듯이 서태지를 모방적이라고 외면하기보다 그의 출현에 적극적 의미를
부여하면서 문화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적극적 관중을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