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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연마다 a-a-b-a 형식을 취할 뿐만 아니라 매 행이 Iambic penta-meter 형식을 띄고 있어 안정적인 느낌을 준다. 혹시 작가인 오마르 카이얌의 주 전공인 수학적 사고방식이 은연중에 작용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의 4행시는 타 작가의 작품에서 흔히 느껴지는 막연한 신비주의를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 자유주의나 합리주의에서 비롯된 무신론적 분위기가 강하게 느껴지고 있다.
짧은 시 한 연씩으로 이어지는 이 작품은 그 한 수 한 수가 다른 주제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작가의 정서적 상태를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새벽에 일어나 고뇌와 회의로 가득찬 인생이라는 주제를 두고 잠시 혼란스러워 하다 이내 포도주에서 망각과 환희의 샘을 찾게 되며, 결국은 불가피한 삶의 종말에 숙명적으로 몸을 내어 맡긴 채 체념한다는 것으로 그 전체 의미가 드러난다.
이런 주제들의 연결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각 시의 특징을 살리기 위해 각기 독립적으로 한 편의 시를 이루게 할 수도 있었으나, 후에 다시 번역한 피츠제럴드는 원본인 루바이야트를 연작시로 만들려고 매우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태양이 떠오르는 곳에서 시작되는 이 시의 작가는 항상 죽음의 그늘에 휩싸인 채 삶에 대한 깊은 체념을 보여주지만 그에 반해 구체적으로 시를 접해보면 현세주의적 인간관이 상당히 짙게 묻어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전반적으로 시 곳곳에서 장미나 포도주와 같은 사물의 사용이 두드러진다. 그러면서도 이 시는 밝은 시구들의 연속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이유는 시인이 줄곧 죽음의 그늘에 휩싸인 채 삶에 대해 깊은 체념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이런 체념은 곧 그 당시 작가가 죽음의 신에게 스스로를 내맡긴 후 자기의 죽음을 둘러싼 몇 가지의 기원을 하며 스스로 루바이야트의 결말을 짓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로 볼 때 이 시는 서정시로 간주되며 그 중에서도 Elegy라고 하는 죽음을 애도하는 글의 기조를 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