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이처럼 부부관계라는 것이 오랜 세월의 흐름 속에서 속절없이 시들어 버리고, 오직 자녀와 주변환경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이어가야만 하는 힘겨운 고행길이란 말인가... 적어도 이러한 작품의 기본 구조는 변화하는 오늘의 세태 속에서 어느덧 고루한 사고방식이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인간관계는 서로가 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의 긴장 속에서 제 맛이 우러나는 법이다. 한 순간이라도 상대방을 향한 이러한 배려를 간과할 때 서로가 상처를 받게 되고, 이러한 악습이 반복되면서 인간관계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야말로 고행길이 되는 것이다. 물론 작품 속의 노부부가 사랑을 시작하고 가꾸어 가던 시대적 상황-유신통치와 군사정권 그리고 산업화- 속에서 작품 속의 교장 선생님인 `그`가 삶에 대한 가치나 의미보다는 가장의 책무를 완수하기에 급급할 수밖에 없었고, 그의 아내인 `그녀` 역시 전통적 사고에 걸맞게 자식에 대한 헌신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음은 인정한다. 그러나, 작품 속의 그녀가 아들, 채훈의 졸업식장에서 보이는 모습에서 우리는 삐뚤어진 부모세대의 자식관을 엿볼 수 있다. 다시 말해, 그녀는 아들, 채훈과 딸, 채정으로부터 그와의 부부관계에서 지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치유 받으려는 보상심리를 보인다. 이러한 사고방식 즉, 전통적인 유교사상에 바탕을 둔 작가의 가치관은 작품의 중심인물인 그녀가 아들, 채훈에게 느끼는 배신감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작가는 그녀의 이러한 가치관이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자연스런 감정으로 여기는 듯 어떠한 논평 없이 스쳐간다.
그러나, 자식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부부의 연을 맺은 남녀가 합의된 성에 의해 잉태한 생명체이며 자신이 부모로부터 헌신 받은 사랑을 베풀 대상일 뿐이다. 즉 자식에게 사랑을 베풀었으므로 다시 돌려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인간의 섭리에서 일면만을 보는 편협한 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