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 가지에 매어달린 가설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앞 소주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 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꺼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신경림의 `농무`는 첫행부터 어떤 공연이 끝나고 농무를 하는 농민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그 묘사된 풍경은 현실의 모습을 재현하는 것처럼 보이며 어디에도 비문법적인 요소가 등장하지 않는다. `징이 울린다/막이 내렸다`는 첫행은 농무가 시작되기 전에 어떤 공연이 있었고 그리고 그것이 끝났다는 사실을 암시해준다. 그 다음 `오동나무 가지에 매어달린 가설무대`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은 공연이 끝난 뒤의 허전하고 쓸쓸한 분위기를 말해준다.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 역시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는 넉두리가 있기는 하지만 공연 후의 공허감을 달래기 위해 술을 마시는 사람들에 대한 재현적 묘사로 보아도 의미론적으로 이상이 없다. 다음의 농무 과정도 마찬가지다. 공연이 끝나고 농무가 진행되는 장면을 그대로 묘사해 놓은 것처럼 보인다.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 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라는 구절이 전통적인 농무 풍경과 어울리지 않기는 하지만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의 의미론적 전이가 나타나기까지 현실의 재현적 묘사는 탄탄하게 유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