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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문물의 도입
이 시기에는 공장이나 상회와 같은 근대적 기업도 나타났고, 각종 물산을 파는 상회들이 1883년부터 자주 눈에 띈다. 농업과 양잠에서도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는가 하면 가축의 품종개량과 사육개선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밖에 제2차 수신사 김홍집의 수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종두법(種痘法)을 배우고 돌아온 지석영(池錫永)은 우두국(牛痘局)을 설치하고 종두를 실시하였다.
또한 중요한 것이 신문의 발간이었다. 이는 당초 고종의 명을 받아 박영효와 유길준 등 급진개화파가 추진하였으나 그 주체가 온건개화파로 바뀌어 1883년 10월 《한성순보(漢城旬報》가 창간되기에 이르렀다. 이 신문은 정부에서 발행한 만큼 관보(官報)의 성격을 띠고는 있었지만, 국민들에게 서양의 사정과 지식을 알려주고 개화의식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한편 개항 이후 각국과의 교류와 교역을 통하여 선진문물과 제도들이 들어왔지만 종교만큼은 엄격히 금지되었다. 위정척사론자들은 물론 온건개화파들조차도 서양의 종교인 기독교는 받다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양제국과 수호조약을 맺으면서도 기독교의 유입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던 가운데 미국 감리교 목사 맥클레이(R. S. Maclay)가 1884년 6월 조선을 방문하여 고종으로부터 선교윤허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결정적인 도움을 준 사람이 김옥균이었다. 그런데 이 때 허락된 선교의 범위는 어디까지나 교육과 의료부문에만 한정되었으며, 공개적인 포교는 여전히 금지되었다. 따라서 초기 선교사들은 교육과 의료활동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그 결과 이 분야의 개화에 선구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사실 조선정부가 추진한 개화정책 가운데 교육과 의료에 관한 것은 상대적으로 적었으며, 그 역할을 대신한 것이 기독교 계열의 학교와 병원이었다. 선교회가 들어온 지역에는 거의 예외없이 학교와 병원이 세워졌으며, 이들은 그 지역 교육과 의료활동의 중심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