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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초등 학교 교사가 되어 1920년부터 오스트리아의 여러 작은 도시에서 근무했다. 이 기간 동안 비트겐슈타인은 극도로 불행했으며, 자주 자살을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어린 학생들과의 관계를 생각하며 어려움을 견딜 수 있었다. 마침내 몇몇 다른 교사와 마을 사람들 사이에 심각한 알력이 생겨서 1925년 비트겐슈타인은 교사생활을 그만두었다. 몇 달 동안 그는 빈 근처의 수도원에서 정원사 보조원으로 일했다. 그 뒤 누이로부터 빈에 저택을 건축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를 받아들였다. 2년에 걸친 이 사업에서 그는 특유의 집중력과 독창성을 발휘했다. 비트겐슈타인의 음악적 재능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청년시절 클라리넷을 연주했으며, 어려운 고전음악을 휘파람으로 불 줄 아는 드문 재능을 지녔고 때때로 긴 악절을 휘파람으로 암송하기도 했다. 비트겐슈타인의 독특한 지성과 인격, 음악의 세련됨이 한꺼번에 드러난 사건이 있었다. 유명한 현악 4중주단이 어떤 집에서 리허설을 하고 있었는데, 비트겐슈타인은 그때 소수의 청중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애써 참으면서 음악의 해석에 관해 몇 가지 겸손한 평을 했다. 당시의 목격자에 따르면 그는 결국 열정에 휘말려서 리허설에 끼어 들었으며 연주자들은 처음에는 정중하게 무시했으나 나중의 리허설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의 지적을 완전히 받아들여 주로 그가 이끌었고 그의 반론과 충고도 마치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 자신이 이들의 러허설을 간섭하고 있는 것처럼 공손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제 1차 세계대전 뒤 10년 동안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을 연구하지 않았지만 뛰어난 젊은 철학자 프랭크 램지와 논리실증주의를 창안한 이른바 빈 학파의 몇몇 성원 등 다른 철학자들과 가끔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