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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혁명으로 유소기(유소기), 등소평(등소평)을 비롯한 우파 실무 파를 숙청한 모택동과 그의 추종자들은 1969년 4월 제 9기 당 전국대표대회에서 문화혁명을 일단 매듭짓고 임표(임표)를 당부주석으로 승진시키면서 당규 약에 그를 모택동의 후계자로 지명하는 규정을 삽입했다. 그러나 문혁기간 동안 정치적 영향력이 급증한 군을 장악하고 잇던 임표와 실질적인 중구그이 실력자 모택동 간에는 많은 문제에서 견해차를 보였다. 이에 모택동은 강청(강청)을 중심으로 한 4인방(인방)을 권력핵심에 포진시킴으로써 임표를 제거하려 했다. 궁지에 몰린 임표는 1971년 9월 13일 모택동을 타도하려는 쿠테타를 일으켰으나 결국 실패하고, 소련으로 탈출하던 중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게된다.
1970년대 초 문혁의 후휴증에서 벗어난 중국은 경제 활성화가 당면 과제로 떠오르게 된다. 이에 실각한 등소평을 비롯한 많은 실무 파들이 속속 복권되게 되고 이것은 기존의 권력을 잡고 있던 4인방과의 충돌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4인방은 1976년 1월 총리 주은래(주은래)추모로 일어난 군중시위 사건인 천안문사건(4.5운동)의 배후 조종자로 등소평을 지목해 1967년에 이어 그를 다시 실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모택동이 1976년 9월 9일 사망하게 됨에 따라 주은래의 뒤를 이어 제 2인자로 있던 화국봉(화국봉)이 4인방을 숙청하고 권력을 잡게 된다. 화국봉은 4개 현대계획이라는 대형 프로젝트 건설을 추진하여 중국경제를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야심을 가졌지만 중공업에 치중한 경제정책은 상대적으로 경공업과 농업을 도외시 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해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