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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의 사치가 두드러지게 되는 것은 귀족의 자제들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고 저항파 지식인이었던 선조들에 대한 기억도 흐려지던 서진시대에 들어서부터이다.
사미렴, 즉 서진의 무제는 당초 이러한 사치풍조에 뭔가 제동장치를 마련하고자 했지만, 서진 왕조 창업의 일등공신 중 한 사람으로서 위진 교체기에 사예교위로서 놀라운 수완을 발휘한 하증까지 사치삼매로 세월을 보내는 모습을 보고 규제를 단념했다고 전해진다.
당시의 귀족들이 사치를 다투어 찐쌀 말린 것이나 양초를 연료로 사용하는가 하면, 하증처럼 궁중의 요리는 맛이 없다고 입에 대지도 않는 등 황제도 아랑곳 하지 않는 이들의 행태는 귀족들이 얼마나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며 일세는 풍미하였는지 잘 보여준다.
귀족들의 사치벽은 보이지 않는곳에 사치를 부리고 진기한 소재를 소모품으로 흔적도 없이 써버리는 것으로, 시대의 기념비적인 만리장성이나 대운하 건설로 권력을 과시한 황제들의 사치와는 아주 대조적이다. 여기에는 틀림없이 농후한 퇴폐적인 분위기를 띤 귀족적 미의식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미의식이 `뭔가 범인과는 다른 일을 하려 남에게 주목받기를 원하는 마음의 화려함`과 결부되어 더욱더 세련됨을 응축한 사치경쟁을 부추겼다는 것이다.
석숭, 왕개, 왕제 즉 ` 사치삼인방`의 경우 왕개는 무제의 숙부, ㅗ앙제는 무제의 사위라는 식으로 왕실 인척으로서 이를테면 `금이 떨어지는 나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므로 당연히 자금이 넉넉했을 것이다.
석숭은 부모가 물려준 재산이 엄청난데다가 자신의 호북성 형주의 자사(장관)로 재직하고 있을 때 원정오는 상인들을 위협하여 강탈한 금품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