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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I. I. 향약시행의 배경
성종 16년(1485)에 經國大典이 완성됨으로 제도의 완비를 보게 된 官僚體制는 성립때 부터 집권세력과 야권세력으로 나뉘었던 사대부층을 더욱 양분화하는 역할을 하였다. 김무진, 「율곡향약의 사회적 성격」 ꡔ학림ꡕ5, 연세대사학연구회, 1983
정치적 권력과 경제적 수입의 원천, 사회적 위세의 상징인 관직의 획득 방법이 실질적으로 사대부층에게만 열려 있었던 이유로 사대부층을 정치적 · 경제적으로 양분하게 되었던 것이다. 儒學을 수업한 이들은 ‘學也緣在基中’ ꡔ論語ꡕ 「衛靈公」, 子曰 學也緣在其中. 子夏仕而優學 學而優則仕.
이란 말과 같이 학업이 곧 과업이 되어 일정한 관직과 그에 따른 경제적 이익을 놓고 다투게 되었던 것이다. 더우기 봉건교학인 주자학을 수업한 士林派의 정치세력으로의 등장은 이를 더욱 격화시켰다.
이것은 留鄕所 復立을 둘러 싼 갈등으로 드러나기도 하였으며, 사림파의 계속적인 훈구파의 정치성향에 대한 비판은 결국 戊午士禍를 초래하였다. 두세력의 다툼은 중종반정으로 훈구파가 정권을 쥐게되고 사림파가 趙光祖등을 중심으로 재등장하자 다시 펼쳐졌다. 사림파는 賢良科설치, 향약실시 등을 통하여 정치기반을 확장하여 나갔고 小學을 강조함으로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였으며 훈구파를 제거하려 하였다. 이 결과로 훈구파에 의한 己卯士禍를 불러 일으켜 사림파는 다시 위축되었다.
이러한 갈등은 명종 20년 文定大妃의 昇遐로 사림파가 재등장하여 정국은 사림간의 대립인 朋黨政治가 시작된다. 이러한 정치적 불안정은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약화시켜 토지겸병의 원인이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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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파의 향약보급운동-16세기의 경제변동과 관련하여」 ꡔ한국문 화ꡕ4,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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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덕, ꡔ향청연구ꡕ, 한국연구원, 1978
김무진, 「율곡향약의 사회적 성격」 ꡔ학림ꡕ5, 연세대사학연구회, 1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