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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스런 시간은 그 뒤에 더욱 많았는데도 그 때가 제일 힘들었어요. 당신이 돌아올 가망은 점점 멀어지고 내게는 모든 가치들이 퇴색해 버리고 있는 것 같았죠. 그림 따위를 무엇 때문에 붙들고 있는지 조용한 환멸이 가슴 밑바닥에 천천히 번져가고 있는 느낌이었어요.`
이러한 고백처럼 새로운 예술 세계를 찾아간 윤희는 그림에 몰두하면서 죽은 남편에 대한 애착과 허망한 알콜 기운으로 살아가는 할머니 마리와 이혼남 이희수를 이웃으로 사귀게 된다.
희수는 자신의 거실에 새끼 금동불상을 세워둔 너무나 인간적인 편안함과 따뜻함을 지닌 휴머니즘적인 남자이다. 환경 공학도로서 기계적인 세계관을 거부하는 불교적 생명론자 희수의 모습을 작가는 지식인의 새로운 전형적 가능성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이념, 대립, 갈등, 투쟁. 빨치산이었던 아버지로부터 시작하여 현우에 이르기까지 윤희와 더불어 했던 강박 관념, 이 업보로부터 자유를 갈구했던 그녀는 이국 땅 베를린에서의 고독을 낯선 남자 이희수를 통해 따뜻히 위안 받는다. 그리고 윤희는 희수와 함께 무너지기 시작하는 동구권 사회주의와 독일 통일의 세계적 변화를 목도한다.
90년대의 세계는 바야흐로 이상이 아닌 자본의 힘으로 흐름을 바꾸기 시작했던 것이다. 변화된 세상속에서 현우의 격정과는 다른 자신의 세계관을 신뢰하는 희수의 성실성, 개인주의에 윤희가 매료되어 갈 무렵 희수는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상처받은 윤희는 송영태와 동행하여 시베리아 대륙 횡단 여행을 마친 후 진정으로 끌어 안아야 할 사랑이, 윤희를 둘러 싼 이 모든 인생의 무거움임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