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1. 태조의 호족정책
이러한 류동상태하에서 왕건은 안정과 번영을 누리던 신라시대의 질서는 회복하는데 노력하였고, 한편으로는 호족과의 타협과 련합을 모색하여 정권의 절대적 안정을 도모하였다. 고려초기의 정권을 호족과 귀족의 련합정권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여기에 있 는 것이다.
혼인정책
그는 이를 위해 우선 결혼정책이었다. 《고려사》후비렬전에 의하면 왕건은 6명의 왕후와 23명의 부인을 맞고 있는데 이는 대체로 정략결혼에 의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신혜왕후 유씨 : 정천인 삼중대광 천궁의 여
정화왕후 오씨 : 나천인 다 의 여
신명왕후 유씨 : 충천인 증태사.내사령경달의 여
신정왕후 황보씨 : 황천인 태위 삼중대광. 충의공제공의 여
정덕왕후 유씨 : 정천인 시중 덕영의 여) 김철준, <후삼국시대의 지배세력의 성격>, 《이상백회갑기념논총》, 1964;《한국고대사회연구 》, (지식산업사:1975) , p. 266.
위의 여섯왕후의 출신만 보더라도, 정천의 유씨와 나주의 오씨는 각기 서해중부와 남부의 해상세력집안이고, 충천의 유씨는 중부 내륙지역의 일세를 대변하는 호족이며 황천의 황보씨도 예성강서북의 패서 내륙지역 일대를 대표하는 호족세력인 것이다.) 이태진, <김치양란의 성격 - 고려초 서경세력의 정치적 추이와 관련하여>,《한국사연구》17, 1977, pp. 69~73.
부인들의 경우도 대략 이와 유사하거나 이처럼 왕건은 각지방의 유력한 호족내지는 호족출신관료의 딸들과 혼인함으로써 그들 과의 결합을 굳게 하려 하였다.) 강원정소 저 , 박용운 역, <고려왕족の성립 - 특た태조の혼인そ중심として>,《조선사연구회론 문집》2 , 1966.
그리고 이것은 또한 호족들의 입장에서도 딸을 왕에게 주어 외위로서의 지위를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