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통일기 신라사회에 대한 중국 사서의 인식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실제 『구당서』와 『신당서』가 주요 검토 대상이 되는 동시에 양 사서의 차이점 또한 면밀히 음미되어야 할 것이다. 논자들은 대부분 이 두 사서간 100여 년의 간극을 크게 주목하여 중국 사학사상 고대와 근대의 구분시기로 파악한다. 사실 『구당서』를 수찬하던 후진 당시는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기였으므로 사료와 실록 등의 산실이 심하였고, 이를 수집하여 질서있게 정리할 만한 문화적인 분위기나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새로 편찬된 『신당서』도 논란을 종식시키지 못하였다. 『신당서』 편찬 직후부터 다시 이에 대한 비판이 일어났고, 양 당서의 우열론이 발생하였다. 논의의 가장 첨예한 부분은 사료 선택에 있었다. 『구당서』가 주로 실록 등 관문서를 취한 데 반해, 『신당서』는 소설·일사 등 야사적 자료를 취하였던 것이다. 아울러 『구당서』가 사륙병려문 전성기의 사료를 그대로 채용한 반면, 『신당서』는 이를 모두 고문으로 고쳐 썼다. 당 중엽 유종원과 한유를 중심으로 일어난 고문주의는 『신당서』를 수찬한 구양수와 송기에 의해 보편화되었던 것이다.
사마광의 『자치통감』은 제왕학을 목적으로 주 위열왕부터 후주 세종대까지를 다룬 편년체 통사로서 원풍 7년(1084)에 완성되었다. 사마광은 『신당서』나 『신오대사』를 염두에 두지 않을을 뿐 아니라, 사실에 대한 포폄에 있어 구양수와는 다른 입장을 견지한 까닭에 비록 소설이나 야사 등의 채용은 『신당서』의 방침을 수용하였으나, 대체적인 사실의 경우는 『구당서』 및 『책부원귀』와 일치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사마광을 도와 『자치통감』을 찬수할 때 당사를 분장했던 범조우가 원우 원년(1086)에 찬성한 『당감』은 『자치통감』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성과라 할 수 있는바, 일부 삼국 관련 사실을 참고할 수 있다. 덧붙여 신종 희녕 3년(1070) 송민구에 의해 이루어진 『당대조령집』에서도 몇 가지 삼국 관련 조서와 책문을 참고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