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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식민통치의 말기인 1940년대에도 학생과 교사의 항일투쟁은 계속되었다. 1942년 2월 2일에는 청주사범학교 교유와 학생이, 3월에는 음성 문괴학교 교사가 각각 일제를 비난하다가 불온언동죄로 피체되어 옥고를 치루었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책, pp.745-749.
1920년 12월, 전국에서 1백여 청년단체가 모여 조선청년련합회를 결성할 때 충청지방에서는 청주청년회(김태희 외 1인), 괴산청년회(유홍규)에서 각각 대표를 파견하여 동참하였다. 충북지방의 청년회 인사가 연합회에 참여한 인원은 타도에 비해 매우 적은 숫자이나, 이 중 청주청년회의 유세면은 의사장에 피임된 바 있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제10권, 982-989쪽. 전국에서 1백여 단체가 모인 연합회에 충북지방에서는 2개 단체만이 참가하였다.
청년회의 독립운동단체로서의 성격을 가장 명확히 보여주는 것은 괴산청년회의 경우라 할 수 있다. 박걸순, 『괴산지방 항일독립운동사』, 199-210쪽.
괴산청년회는 1920년 8월 5일 유문규 등 십여명의 발기로 창립되었다. 『동아일보』, 1920년 8월 18일자. 이날 피선된 괴산청년회의 임원진은 회장 유홍규, 총무 김영규, 덕육부장 김사원, 지육부장 유문규, 체육부장 김태응 등이었다.
창립 이후 로동야학 개설, 『동아일보』, 1920년 9월 18일자 및 1928년 1월 3일자.
보성의숙 경영 『동아일보』, 1923년 4월 17일자. 그러나 보성의숙은 1928년 일제에 의해 돌연 불허가처분을 당하였고, 함께 운영하던 녀자야학도 금지처분 당하였다(『동아일보』, 1928년 3월 26일자). 이는 괴산청년회가 신간회 지회결성을 주도하는 등 민족운동의 전위로 활동하자 탄압하였음이 분명하다.
등 교육활동과 연극공연 『동아일보』, 1921년 8월 19일자.
등을 통해 민중계도운동을 전개해 왔다. 그러나 괴산청년회는 일제의 주시를 받아왔고, 신간회 지회 결성을 …
등을 통해 민중계도운동을 전개해 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