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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원경하(元景夏)가 호남別遺御史로 임명되어서 전라도 부안에 들렀을 때, 두레의 농기(旗)와 풍물기(器)가 민중들의 반란시에 군용물(軍用物)이 될 수 있다고 보고 농기와 풍물기들을 몰수한 적이 있고, 1838년 ‘암행어사 남태량(南泰良)’이 두레에 대하여 임금께 보고를 하자. 임금이 “왜 농민들은 꽹과리와 징을 가지고 농사를 짓느냐?”고 묻자 우의정 송인평(宋寅明)은 “농사를 짓고 수확을 할 때는 모두가 그 악기를 가지고 일을 한다”고 대답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영조실록(英祖實錄)』에는 농악에 대한 국왕의 물음에 암행어사는 들에서 일을 할 때 일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꽹과리와 북을 두드리어 사기를 올려 일을 하게 한다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또 임금이 두레의 농기(農旗)가 군대에서 사용하는 깃발과 같은 것이냐고 묻자, 호남 암행어사는 농기와 풍물기는 군대용이 아닌 백년민속으로서 금지하기가 어렵다고 대답한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이 단편적이나마 호남지방에는 두레와 풍물이 성행하였음을 알 수가 있고, 또 조선왕조의 지배층이 두레와 풍물에 대하여 그렇게 호의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대시한 것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농민이 반발해서 폭동을 일으킬 염려가 있기 때문에 양반들은 농민들을 조종하여 세뇌하려고도 하였다. 그리하여 풍물을 하게하여 쌓였던 불만을 발산시켜 반발을 사전에 방지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현상은 일제시대 때에는 식민지정책의 하나로 농민들이 단합하게 되는 풍물을 금지시켜 한국인의 공동체를 해산시킨 데 목적을 두고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