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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 불 2교의 교섭◆ 유교가 신라사에서 중요하게 되는 것은 중대의 전제주의가 성립하면서부터였다. 유교는 주로 륙두품 지식인을 중심으로 수용되었는데, 신라 중대에 왕실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진골귀족을 억압하는 대신 그들과 이해를 달리한 6두품 귀족을 측근 세력으로 키워 나갔다. 자연 6두품 귀족들은 진골귀족과 함께 불교에 대해서도 비판적 입장을 취하였다. 신라 중대에 유교적 정치이념이 도입되면서 불교 및 유교의 논리는 각각 독자의 영역을 가지면서 서로 비판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신라 전통적인 진골귀족의 입장을 대변하는 금대문은 유교의 논리를 비판적으로 보았음에 대해, 설총은 불교 논리에 대해 은근히 비판적이었다. 설총은 원효의 아들로서 유학자였다. 그는 유학자로 자리하는 과정에서 정신적 고민을 느껴왔고, 그 결과 불교 논리를 비판하는 입장에 섰을 것으로 생각한다. 불교에 대한 비판은 강수에게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났다. 그는 불교를「세외교」라 배척하고는 유교를 배우려한다고 하였다.
불교와 유교의 논리가 가장 차이를 보이면서 서로 대조적으로 비교된 것은 세외교와 세내교였음이 분명하다. 물론 유교가 세내교라고 언급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불교의 세외교와 비교하여 그렇게 생각된다. 강수가 불교를 세외교라 한 것은 출가하여 입산 수도하는 면을 이름이다. 속세를 떠나 출가하면 천륜과 인륜을 저버리게 된다. 그럴 경우 불교와는
달리 유교는 세내교로서 자리하게 되었고, 불교의 출가는 효도와 부합할 수 없게 되었다.
신라 중대 이래에 유학자들의 불교에 대한 비판은 효도에 대한 것이었다. 곧 출가하게 되면 누가 어버이를 모시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귀족들과는 달리, 홀어머니를 모시고 날품으로 그날그날의 생계를 이어가야 하는 서민들에게는 심각한 사회문제로 등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