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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자감이 위축되는 대신에 사학 12도가 번영을 누리는 현상은 [자료4] 예종과 인종의 적극적인 관학진흥책(관학진흥책)이 시행되면서 바뀌게 되었다. 뒤이어 무신정권이 들어서고 몽고의 침입이 계속되는 동안 침체를 면치 못하였는데, 그러한 중에도 사학 12도는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한 예가 보인다 [자료12]. 시기에 따라 다소 달랐겠지만 사학 12도는 교육과정상 국립대학인 국자감과 대체적으로 비등한 위치에 있었다. 사학은 공양왕 3년(1391)에 정파(정파)되었다.
그밖에 경향(경향) 각지에 후세의 서당(서당)과 맥락을 같이하는 서재가 산재해 있어 보통교육을 담당하였다 [자료9]. 이 서재 교육은 일찍부터 보급되었는데, 특히 고려후기에는 학자들이 관계를 은퇴하여 한가한 시간을 갖게 되면 서재를 세워 후학을 교육시키는 일이 많았다.
고려시기 교육은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양성하는데 주된 목적을 두고 실시되어, 중앙에 관학인 국자감과 사학인 12공도가 핵심이었다. 문벌귀족이 세력을 떨치던 시기에는 사학이 크게 번창하였다. 두 교육기관은 고려말, 조선초에 새롭게 정돈된다.
이상의 관학(관학)과 계통이 다른 사학(사학)이 크게 발달하였다는 점에 고려시기 교육제도의 특징이 있다. 흔히 말하는 사학12도(사학12공도)는 최충(최)의 문헌공도를 비롯한 12개의 사학을 말하는데, 대개 문종 때 성립되어 공양왕 3년(1391)까지 지속하면서 고려의 교육에 이바지하였다. 처음으로 사학을 일으킨 사람은 최충(최)이었다. 최충은 송악산(송악산) 아래의 자하동(자하동)에 학당(학당)을 마련하여 낙성(악성) 대중(대중) 성명(성명) 경업(경업) 조도(조도) 솔…
이상의 관학(관학)과 계통이 다른 사학(사학)이 크게 발달하였다는 점에 고려시기 교육제도의 특징이 있다. 흔히 말하는 사학12도(사학12공도)는 최충(최)의 문헌공도를 비롯한 12…
참고문헌
허흥식, 『고려과거제도사연구』, 1981, 일조각
신천식, 『고려교육제도사연구』, 1983, 형설출판사
민병하, 「고려시대에 있어서 성균관의 성립과 발전」 『대동문화연구』6・7 , 1969・1970
신천식, 「중앙의 교육기관」 『한국사』17, 1994
송춘영, 「지방의 교육기관」 『한국사』17,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