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어머니가 그토록 자신하던 근대가 이렇게 빈약한 것이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어린 화자의 방황이 시작된다. 이 방황은 어린 화자로서는 해결하기 힘든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방황이란 모순되는 축들 사이에서 어떤 균형감각을 찾을 때 해결될 수 있다면, 어린 화자를 방황하게 했던 축이 어느 누구도 쉽게 감당하기 힘든 중요한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린 화자는 전근대와 근대 사이를 오가야 했고 또 그리고 근대에서도 문안(진보성, 혹은 빛)과 문밖(악마성, 혹은 어두움) 양축을 끊임없이 교차해야 했던 것이다. 어린 화자는 자신의 내부에서 어떤 거대한 분열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화자의 어머니부터가 그러하다. 다만 화자의 어머니는 이 분열을, 위의 인용에서 볼 수 있듯, 놀라운 변신술과 연기력으로 모면하고 있을 뿐이다.
박적골에서는 그 힘겨운 서울 생활을 감추면서 떳떳하고, 그리고 문밖에서는 어머니가 그토록 혐오하던 박적골을 빌미로 확신에 찬 어머니의 두 얼굴에 대한 천착은 의미심장하다. 한국은 저개발국가였다. 즉 선진자본주의국가의 발전을 뒤좇은 국가였다. 따라서 한국은 선진자본주의국가를 발전모델로 삼고 그에 맞추어 역사를 진행시켰다. 서양에 비해 남루한 현실을 오로지 낡은 것 모두에게 돌리고 또 그들이 꿈꾸는 새로운 질서(자본주의)에 진보성과 악마성이라는 양면적 얼굴이 있다는 것도 확인하지 않은 채 낡은 것은 곧 악이나 새로운 것은 선이라는 신념하에 낡은 모든 것을 청산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자생적인 노력은 곧 일본에 의해 좌절되었으며 그 결과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사회적 모델로 제시하지 못한 채 자본주의의 강제적 이식이 진행되었다. 이러한 강제적 이식과정은 엄연한 현실이므로 그 선험적인 모델이나 제도, 혹은 관념이 아무리 이해할 수 없는 것이더라도 그 선험적인 틀을 사회구성원 모두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렇다고 사회구성원의 인식이 한순간에 변하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