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첫째, 일제하 소작쟁의는 그 대상에 따라 한국인 지주에 대한 투쟁과 일제지주에 대한 투쟁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선 한국인 지주와의 투쟁을 보면 1922년 12월 순천에서 경우처럼 1,6000명의 면민이 지주와 대항하다가 면이나 군 또는 주재소에 진정을 하는데 이러한 과정이 일반적 형태이다. 이런 과정에서 일제 관헌의 개입으로 간부의 검거, 투옥 등의 사태가 발생하게 되었고 이렇게 되면 간부들의 석방을 요구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위에서도 주지한 바로 암태도 소작쟁의이다. 이렇게 단순한 소작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는 조선인 지주에 대한 투쟁은 투옥, 재판 등의 일제의 탄압을 낳게 되면서 농민운동을 정치적 성격으로 변화시키고 이것은 일제 식민지통치에 대한 반제투쟁으로 발전할 수 밖에 없었다.
둘째, 일본 지주와 일제 농자에 대한 소작쟁의는 당초부터 조선인 토착 지주와의 소작쟁의와는성격을 달리한다. 식민통치에 대한 민족 항쟁적 성격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때문에 그 투쟁방법도 훨씬 철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북율 소작쟁의이다.
셋째, 소작쟁의는 역사적 배경 속에서 실시된 토지조사사업과 산미증식계획의 식민지 농업정책의 생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을 통하여 많은 국유지를 수탈하였으며 농민들의 소유권은 물론 관습상의 농작권 등 제권리를 박탈, 삭감시킴으로써 농민들이 소작농으로 전락하였다. 또한 토지조사사업으로 식민지 농업정책 기반을 굳건히 하는데 성공한 일제는 농민들의 생활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어 더 많은 소작농이 몰락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서 토지조사사업 전후 또는 진행과정에서 개별 분산적으로 있었던 농민들의 저항은 본격적인 소작쟁의하는 조직적인 농민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넷째, 소작쟁의의 원인은 고율의 소작료와 소작권 이동에 대한 항쟁이 대표적이다. 소작료의 고율화 현상은 봉건적 지배조건의 소산이 아니라 일제하 식민지 농업정책이 가져온 결과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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