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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버는 법률과 경제사를 공부하는 동안 거의 내내 복종을 강요하는 부모와 끊임없이 충돌해야 했다. 20대 중반과 후반 전혀 수입이 없는 사법관 시보와 대학 조교 생활을 했기 때문에 1893년 집을 떠날 때까지도 재정적으로 독립할 능력을 갖지 못했다. 그해 가을 베를린대학교 임시 법학강사로 채용되었으며, 육촌 마리안네 슈니트거와 결혼했다. 베버는 결혼 뒤에도 의무적인 노동을 계속했다. 그는 1884년 베를린으로 돌아온 후 의무적으로 노동을 행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자기도 모르게 선조들의 칼뱅주의 전통에 경외심을 갖게 되었다. 베버의 생각에는, 스스로에 대한 노동의 강제를 통해서만 자기가 천성적으로 타고난 방종과 게으름에 빠지는 것을 미리 막을 수 있었다. 방종과 게으름에 빠지면 결국 정서적·정신적으로 위기를 겪게 마련이었다.
더할 나위 없는 명석함과 엄격하게 통제된 지적인 노력으로 베버는 매우 빠르게 승진할 수 있었다. 베를린대학교 임시 강사가 된 지 겨우 1년 만에 프라이부르크대학교 정교수가 되었으며, 다음해인 1896년 하이델베르크대학교 정교수가 되었다. 고대 로마 농업사와 중세 상업발달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과 그 이후의 논문에 이어,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학술단체인 사회정책협회(1890)를 위해 독일 동부 토지문제를 종합적으로 분석한 논문을 발표했으며, 고대 로마를 쇠퇴하게 한 사회적 배경과 독일 증권거래소에 관한 여러 편의 중요한 논문을 발표했다. 또한 이무렵 좌익 진보단체 프로테스탄트 사회연합(Evangelisch-Soziale Verein)과 함께 정치활동을 하기도 했다.
프라이부르크대학교 취임강연
초기 학문생활의 절정은 1895년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가진 취임강연이었다. 강연을 통해 베버는 독일 동부 엘베 강 지역 토지문제에 관한 약 5년 동안에 걸친 연구를 종합하면서 지배계급인 융커를 역사적으로 쓸모없는 계급으로 규정하며 통렬하게 규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