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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논쟁
251년 로마의 노바티아누스 분파는 사변적 신학으로부터 관심을 돌려 교회의 교인 자격과 성례전의 유효성에 관한 법적 문제에 집중하였다. 이 문제들은 로마와 북아프리카 교회의 분열을 가져왔으며, 그 핵심은 도나투스가 표방한 사상들에 관한 카르타고 논쟁이었다(313). 도나투스파는 성례전의 유효성이 목회자의 자격에 달려 있다고 말했으나, 로마 그리스도교인들과 로마와 유대관계에 있었던 북아프리카의 그리스도교인들은 성례전의 유효성이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설령 효력은 없을지라도 분파주의자가 집전한 세례도 유효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히포의 주교(396~430)이며 위대한 신학자였던 아우구스티누스는 도나투스파와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힘을 쏟았으나 마침내 합리적인 논거를 포기하고 마지못해 제한된 강제력 사용을 정당화하기에 이르렀다.
서방 교회에서 일어난 또 하나의 중요한 논쟁은 훨씬 더 착잡한 문제였다. 그것은 신앙이 하느님의 은혜에서 비롯되는가, 아니면 인간의 자유에서 비롯되는가 하는 문제였다. 영국의 수사 펠라기우스는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느님의 명령을 수행해야 할 인간의 책임을 파기하고 인간의 능력을 부정하였다고 항변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는 모두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적절치 못한 비인격적인 사유범주들을 적용하였다. 교회는 펠라기우스의 사상을 정죄했고, 아우구스티누스의 극단적인 주장들 가운데 일부(특히 예정론과 원죄의 유전론)도 흔쾌히 승인하지 않았다.
그리스 동부에서는 4세기 내내 알렉산드리아의 장로 아리우스(250경~336)가 내세운 주장을 둘러싸고 논쟁이 그치지 않았다. 그는 몸을 가지고 태어나 고난을 당하고 죽은 그리스도가 모든 고통 너머에 있는 초월적인 창조의 제1원인일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