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위의 시에서 보여지듯이 시인은 영혼을 더럽히고 가족의 순함을 깨뜨리고 돌발적인 사랑, 그리고 사랑을 통한 육체의 융합을 증오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자신이 죽었을 때 남을 것은 오직 사랑뿐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에게 현재 필요하고, 취해야 할 것은 사랑임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사랑이 영혼과 육체를 병들게 하고, 갇힌 세계를 만듦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것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사랑 그리고 섹스와 여성기가 그에게는 다른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이기 때문이다. 사랑을 증오하는 여러가지의 이유들이 어떠한 한국인의 유교관과 도덕관에 입각한 사랑에의 평가라면, 얼룩을 남기는 일은 현대에 선 시인의 평가이다. 즉, 사랑은 다른 한 사람과 의사소통을 하고, 의식을 열어 그 사람과 함께 얼룩을 남기는 행위인 것이다.
이러한 얼룩 남기기는 그의 다른 詩속에서 하나의 개체로서의 얼룩남기기가 아닌, 상호침투적인 얼룩남기기 즉, 서로 의사소통하여 서로에게 얼룩 남기기로 나타난다. 이것은 그의 시들이 나타내는 ‘구멍’의 이미지와 통하는데, 우선 그가 처한 의사소통의 어려움이라는 측면과 의사소통의 부재를 나타내주는 시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 시를 먼저 살펴봄으로써 후에 다룰 ‘구멍’에의 갈구를 더욱 명료히 설명하려 함이다. 「밤의 공중전화」를 살펴보자.
……
아무것도 더 이상 쓸 수 없는
검은 벽에다
추락의 깊이를 짐작할 수 없는
밤의 절벽에다
말들이 스스로 몸을 던지는 걸거야
……
입에서 온전한 형태로 나온 말들은
수화기의 작은 구멍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부서지고 조각조각날 거야.
……
전화기는 터져버릴 것 같은
이 말들의 웅성거림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이윽고 음성녹음 테이프 속에다 말들을
감금시켜버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