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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에 이르러 다다는 미술관을 열고, 잡지를 발간하며, 같은 생각을 가진 문학가나 미술가들과 개인적인 접촉을 가지면서 점차 국제적으로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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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에 이르러 다다는 미술관을 열고, 잡지를 발간하며, 같은 생각을 가진 문학가나 미술가들과 개인적인 접촉을 가지면서 점차 국제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다다 라는 말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으나 이 역사적으로 다다라는 말은 나름대로의 강한 의미를 획득하였으므로 그 자체로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으로 생각된다. 1917년은 또한 휠젠벡이 쮜리히를 떠나 베를린에 온 해이기도 하다. 그는 여기서 리히터와 하우스만 등과 함께 독일 다다 선언문 을 발표, 미래파 입체파 독일 표현주의를 격렬하게 비난하였으며 원시주의와 동시성, 자발성, 그리고 이 원리들의 조형예술과 문학 차원에의 적용에 대한 휴고 발의 이론적 실체를 밝혔다. 베를린 다다는 쮜리히 다다가 실험했던 소음 음악과 추상적 음성시 등을 더 깊이 탐구하였다. 1918년 독일의 사회적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고, 소수의 젊은 에술가들이 등장하면서 베를린 다다는 약간의 성격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들 젊은 예술가중 가장 유명한 사람중의 하나인 게오르그 그로츠(George Grosz)는 독일의 탐욕스러운 군국주의와 자본주의를 표현주의적 서사에 의한 풍자로 맹렬하게 고발하였으며, 이 밖에 존 하트필드(John Heartfield)는 포토몽타쥬 기법을 적극적으로 개발하여 다다가 베를린에 뿌리 내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다다의 활동은 점차 상승 기류를 타고 불어나, 점점 더 격렬해지다가 1920년 말을 고비로 갑작스런 활동이 부진해진다.
한편 1919년 쮜리히에서 쾰른으로 온 한스 아르프는 막스 에른스트(Max Ernst)와 바르겔트(Johannes Baargeld)와 함께 뛰어난 조형작품을 남겼다. 그들은 서로 다른 재능들을 일련의 집단적인 작품으로 융합시켜 익명으로 발표하고, 초현실주의 기법을 예고해주는 집단적인 콜라쥬 회사를 차리기도 한다. 이들 역시 1920년, 4월에 개최했던 전시회가 대중들의 반감을 사고 경찰의 개입을 야기시킴으로서 막을 내리게 된다.
참고문헌
김해성, 현대미술을 보는 눈 , 열화당, 1993
홍가이, 현대 미술 문화 비평 , 미진사, 1987
C.W.E.B Bigsby, 박희진 역, 다다와 초현실주의 , 서울대학교 출판부, 1979
H.H. 에너슨, 이영철 외 역, 현대미술의 역사 , 한국색채문화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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