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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문물의 도입은 비단 메이지정부가 들어선 1868년을 기점으로 해서 이뤄진 것만은 아니다. 에도막부가 1854년 페리제독의 黑船에 의해 강제 개국된 직후부터 싹터왔다. 메이지 유신의 주체세력이 됐던 각 藩의 하급무사·지식층들은 개국 직후 앞다퉈 해외로 나가 메이지개혁 프로그램의 토양을 마련한 것이다.『나라의 빗장을 풀 것이냐 말 것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근대국가를 세우느냐』에 메이지유신 주역들은 몰두해 있었다. 洋燈亡國論을 내세운 극단적 攘夷사상은 일부 사족들에게 남아있었지만 개국을 통한 개화의 대세를 막지는 못했다. 이는 똑같은 국제정세하에 있었던 조선조의 우리나라와 많은 대비가 된다. 메이지의 해외사절단이 풀어놓은 서구 근대국가에 대한 신지식과 정보는 엄청난 양이었다. 교육제도에서 육·해군·경찰직제까지 각국 사정을 샅샅이 훑어왔던 것이다. 메이지정부는 이들 중 서로를 저울질하면서 가장 적합한 제도를 채택하였다. 예컨대 1872년에 공포되었던 학제는 프랑스학구제도를 본떴고, 해군은 영군해군을 복제했으나 육군은 프랑스육군을 모방하였다. 체신과 철도는 영국의 예를, 대학은 미국을 따랐다. 또 메이지헌법과 민법은 독일계였으나 형법은 프랑스쪽을 택했다. 메이지헌법을 독일계로 한 것은 독일식 국가관과 부국강병에 대한 영향때문이었다. 말하자면 메이지국가는 영·미·불·독의 혼합국가였던 셈이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 주도층이 일본의 전통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유교와 양명학을 시대 상황에 맞도록 혁신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취해왔다. 메이지유신의 정신은 화혼양재와 다름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