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문제는 사회의 다수 구성원인 시민들은 이러한 사회구조가 과연 `정당성`을 갖는 것인지, 그것을 수용할 것인지 말 것인지 한번도 의사결정을 내릴 기회를 못가졌다는 사실이다. 현재와 같은 모습의 과학기술 발전에 대해서는 정부 기업 과학기술 부문의 이른바 엘리트와 전문가들만이 의사결정에 참여하고 선택할 기회가 부여되어 왔다. 시민은 단지 이들이 결정한 정책의 홍보 대상이거나 과학기술 산물의 수동적 소비자 역할을 해왔을 뿐이다. 핵에너지정책, 정보화정책이 그 대표적인 예들이다. 핵에너지에의 의존과 정보기술의 범람이 가져올 환경적, 사회정치적, 윤리적 결과들에 대한 깊은 인식과 사회적 토론은 결여된 채, 효율성을 앞세운 기술관료적 의사결정만이 선진국이 되는 지름길인 것처럼 언론 등을 통해 홍보되고 있다. 이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에 위배되는 상황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민주주의사회에서 우리는 삶을 지배하는 다른 힘들(법, 정치, 언론 등등)에 대해서는 잘잘못을 자각하고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통제하려고 하는데 반해, 어느덧 그런 지배력이 된 과학기술에 대해 우리 대부분은 자각조차 못하거나 그게 우리의 통제 대상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같다. 그렇다면 사실상 우리는 지구환경 위기에서 보듯 인류와 자연을 절멸로 몰아넣을지도 모를 기술문명의 형성에 아무런 의사표현도 영향력 행사도 못한 채 그냥 엘리트에게 자신의 운명과 미래를 맡기는 객체에 불과한 처지가 아닌가?
과학기술에 대한 의사결정에 시민의 참여기회가 박탈되면 복지, 환경, 안전, 윤리 등 삶의 질을 추구하는 시민의 가치관과 이해는 반영되지 못하고, 이윤과 군사력에 봉사하는 과학기술이 기존 사회구조에 의해 확대재생산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최근 서구에서는 점점 기술화되어가는 사회의 이런 위험과 문제점을 자각하고 기존의 시민권 개념을 과학기술 영역에 확대한 `기술적 시민권`(technological citizenship)에 대하여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