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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영화사 (무성영화시대~1970연대
1920년대까지 홍콩영화는 무성영화시대로 분류된다. 1896년 처음 외화가 상영된 7년 뒤 1913년에 홍콩에서 여민위에 의해 <장자시처>가 최초로 제작된다. 여민위는 `민신영화사`를 건립하여 영화제작에 나서나 파업으로 인해 결국 민신영화사는 중국영화의 중심지인 상해로 옮겨졌다. 그 후 여민위는 상해에서 <손중산선 생릉묘종기기> 같은 선전기록영화를 제작한다. 여민위는 중국최대 극장체인을 가진 노근과 합작하여 영화제작에 힘써 홍콩은 본격적인 영화산업의 시대로 접어든다.
1930년대 홍콩영화에 있어 주요한 특징은 광동어 영화가 주류를 이루었다는 점과 상해 영화인들의 남래로 인해 좌익계열의 영화가 주류를 이루었다는 점이다. 홍콩이 광동어영화의 중심지로 부상한 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중일전쟁으로 광동인들이 대거 홍콩으로 몰려들었다는 점과 둘째로 국민당 정부가 북경어를 사용하게 했다는 점이다. 광동어 영화를 장르별로 보면 통속 멜로극<공주와 시종>, 코미디, 가장 비중이 큰 괴기영화<여섭청구>, 사회교육영화, 항일애국영화로 나눌수 있다. 남래영화인들은 좌파영화인, 진보적 영화인, 애국영화인 3부류로 나눌수 있다. 반제반봉건 영화를 제작한 좌파영화인은 하연<광류>, 사도혜인<자유신>이 있다. 역시 반제반봉건을 주제로한 진보적 영화인으로는 제초생<공부묵난>, <어광곡>이 있다. 그는 주로 진보적 영화운동의 정신을 알리기 위해 항일 영화를 제작하였다. 애국영화인은 좌익세력은 아니지만 주로 선전영화출연을 거부하고 홍콩으로 이주해 항일 영화제작에 참여하였다. 대표적인 감독으로는 30년대 영화의 6분의 1을 제작한 소취옹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