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이에 대해 비평가 대총보치의 발상은 지극히 절충적이다). 이 때 [전통]을 문
제시한 것은 이동이 역사가라 그런 건 아니다. 세기말 예술이 일본 미술을 촉진
시켰다고 과대 선전하여, 일본적 전통과의 친화성은 세기말 예술을 지지하는 쪽
의 논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1910년에 좌야리기는 secession을 소개해 [분리파
건축은 어떤 의미로 일본적 취향을 벽돌조로 표현했다고 말해도 좋다]고 말
했다. 이러한 언급에 그 시기 전통론의 뿌리가 보인다고 볼 수 있겠다.
거기서 최초의 전통론은 어떻게 결론을 내렸을까? 1915년 [메이지 신궁 보물
전] 다음해 1916년에 [일청 생명사옥]의 현상 설계가 있었다. 이 현상 설계는
그때까지의 논쟁을 구체화할 것으로 크게 기대되었다. 그러나 일본 취향의 건축
이 [어려운 문제]라는 것을 실감한 결과였다. 젊은 세대(전형적으로는 후등경
이)에게도, 그 작품은 서양 역사 양식의 부분(특히 지붕)을 일본적 형태에 갖다
놓거나, 일본적인 형태를 불연구조체로 만드는 수법을 얻을 수는 없었다. 결국
부정하게 하는 절충주의적 발상이라는 석가모니의 손바닥에서 자신들이 나타나
지 않는 기분이 든 것이다. 그 한방법으로 모범이 될 만한 secession이 1913, 14
년쯤을 절정으로 대유행이었다. 목표없이 달성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
secession이 역사적 양식의 한 변종으로 취급된 것이 대부분이고, 출발점이었던 창조성은 희박해졌다. 여기에도 양식적 사고의 멍에로 잡은 것이다. 결국 젊은 건축가의 관심은 1917년 경을 분수령으로 [일본]에서 멀어졌다. 그것이 건축 변혁의 줄기였다는 한 방향에서는 개인 내면의 표현 의욕이고, 다른 방향에서는
세계적인 것(cosmopolitanism)이었다. 귀찮게 여겨진 공동체 표현은 시야 밖으
로 제거되었다. 1920년에 분리파 건축회가 [과거 건축권에서의 분리]를 선언할
때, 그 [과거]에는 일본적 요소가 포함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