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학교를 시장이라고 파악할 정도로 냉혹한 분석을 하고 있는 부르디외에 의하면 어떤 수준의 언어를 쓰느냐에 따라 “이익과 손실의 가능성”이 결정된다. 단순화시키면 지식계급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지식인으로서의 이익/손실의 가능성을 갖게 되고, 노동계급의 언어를 사용할 능력밖에 없는 노동계급은 노동자로서 가질 수 있는 이익/손실의 가능성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면, 이 언어의 ‘차이’는 그들이 살아가는 생활세계의 무의식적 반영에 불과한 것이다. 방금 나는 ‘차이’라는 말에 강조 표시를 했는데, 현실적인 차원에서 드러나는 언어의 서열성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이 언어들이 다만 ‘게임의 규칙’이 다를 뿐이라는 점을 확인해 둘 필요성이 있다. 노동계급에서 일상적으로 통용되는 언어나 지식계급에서 사용되는 언어 모두 의사소통에 대한 신념을 기초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 계급 속에서 소통의 방식으로 제기된 언어는 그 언어의 세련성의 정돈 관념성의 정도로 가치판단될 성질은 아닌 것이다.
말하자면, 일정한 계급 내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공동체적 감각을 내부에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 서로 다른 공동체가 만나게 되었을 경우, 이를테면 백화점 점원과 문화 평론가가 만나서 동거하게 되었을 경우, 이들 상호간에 통용되는 언어가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겉도는 말로 변하는 데 있다. 가령 한 편의 작가주의 영화를 함께 본 이들의 반응은 아주 판이하다. 여자의 느낌은 이렇다; “나는 그 영화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영화가 끝난 뒤 그에게 뭔가 괜찮은 말로 그 영화에 대한 말을 한 마디 해보려고 했지만 도대체 그 영화가 전달하려고 하는 메시지조차도 나는 감을 잡을 수가 없을 만큼 그 영화는 지루하게 느껴졌다(p.4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