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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정부가 조직된 곳은 상해였다. 상해에서는 3·1운동 이전에 이미 독립운동 단체인 신한청년당이 조직되어 빠리 강화회의에 김규식(金奎植)을 파견하는 등 활동을 펴고 있었다.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고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상해로 모이게 되자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한 후 1천 여명이 모여 먼저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1919.4.10) 대한민국 임시헌장(大韓民國 臨時憲章)을 선포하는 한편 선거를 통해 국무원을 구성했다. 이 정부 역시 민주광화제를 채택하여 이승만을 행정수반인 국무총리로 선\춝하고 6부(部)의 총장과 차장을 모두 선출했으며 프랑스 조계안에 정부청사도 마련했다. 임시의정원을 구성한 의원들은 국내와 노령·중국령·미국령 등 11개 지방의 대표가 각 지방선거회를 통해 선출되었다.
세 번째 정부는 서울에서 조직되었으며 세칭 한성정부(漢城政府)라고 했다. 3·1운동 직후 서울에서 계획되어 24ㅇ니의 ‘국민대회 13도 대표자’의 이름으로 ‘국민대회 취지서’를 발표하고 ‘임시정부 선포문’을 국내는 물론 당시의 세계적 통신기관인 연합통신(聯合通信)에 발표하여 정부조직을 국외에까지 알렸다.(1919.4.23) 한성정부 역시 공화제를 채택하여 집정관총재(執政官總裁)에 이승만을,국무총리에 이동휘를 추대하고 정부조직을 7부 1국으로 했다. 국내의 13도 3ㅐ표자 명의로 조직된 이 정부가 다른 정부보다 정통성를 가진다고 해서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로서 워싱턴에 그 사무실을 개설했다.
참고문헌
참고도서
강만길 『분단시대의 역사인식』1978년
강만길 『한국현대사』 198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