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1. 서론
1) 한일국교정상화의 사전적 정의
1965년 6월, 도쿄에서 한일기본관계조약 외에 ‘어업협정’, ‘청구권ㆍ경제협력협정’, ‘재일 한국인의 법적 지위ㆍ대우협정’ 등 관계문서의 조인이 이루어져 동년 12월 서울에서 비준서의 교환식이 이루어졌다. 한일합병조약에 대해서는 그 실효의 시기를 둘러싸고 최후까지 양국이 견해를 달리하였기 때문에 타협이 어려워져 결국 ‘이미 무효’라의 표현이 이용되었으며, 한일 양국이 유연하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고 간신히 합의에 달하였다. 이리하여 한일관계는 전후 20년에 이르는 ‘비정상’적인 시대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2) 결정과정
(1) 박정희 정권 이전의 한일회담
미국의 주도아래 한국과 일본은 1951년부터 공식적인 관계를 갖기 시작하였고, 한국은 미국의 일방적인 지원 하에 일본과의 뿌리깊은 갈등을 드러내었다. 한국의 주된 관심사는 북산 사회주의정권으로부터의 방위와 전후 경제부흥이었고 일본보다도 미국의 지원을 필요로 하였다. 그러나 상황의 역사적 원천은 1950년대 후반부터 1965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한국이 한일 국교정상화에 적극적인태도로 돌아서게 된 데는 먼저 1960년대 전반기 미국의 경제 및 군사적 원조가 삭감되는 가운데 공산주의와 대항할 수 있는 실력을 배양하기 위함이었고, 안전보장의 관점에서도 국교정상화가 필요하였다는 점 그리고 미국이 동북아의 평화유지에 필요한 자신의 장기적인 부담경감의 의도에서 한일국교정상화를 강력히 희망하여 교섭타결을 요구한 점으로 꼽을 수 있다. 당시 미국은 1960년대 중반에 베트남전쟁의 수렁에 빠져들고, 중국의 원폭실험 성공, 그리고 중국과 프랑스의 화해 등으로 인해 미국과 일본은 협조를 강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일본 역시 대한민국 원조의 분담에 관한 미국의 요구를 적극 수용하게 된다.
(2) 박정희 정권 당시의 한일회담
한국의 군사정…
의 조기타결을 강조하는 등 미국의 한일국교정상화를 지원하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한일 양국도 미국 요구에 적극 호응하였다. 그 이유는 1963년 한국의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가 승리하였고, 11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당인 민주공화당이 압승을 하면서 미국은 한일관계 정상화의 국내정치적 기반이 정비된 것으로 판단하였고, 박정희 대통령과 이케다 수상이 1월 24일 케네디 장례식에 참석함에 따라 자연스런 형식으로 미국의 영향력 행사의 자리가 준비되었다. 존슨대통령은 박대통령과의 면담에서 한일회담의 조기타결의 중요성을 역설하였고, 이후 이케다 수상과의 면담을 하였는데, 한일회담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대외원조에서 일본의 역할 분담을 요청하였다. 한일 양국 역시 이러한 미국의 움직임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박정희는 1964년 연두교서를 통해 5월에 조인하며 6월말 비준한다는 일정을 제시하였고, 이케다 내각 역시 1월의 시정방침을 확정하였다. 이후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방일하여 오히라 외상과 5월에 타결에 합의함으로써 회담은 최종 국면을 맞이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교섭의 최종 타결까지는 여러 장애가 있었는데, 1964년 3월 야당의원들이 만든 대일 굴욕외교에 반대 그리고 범국민투쟁위원회의 활동에 종교 및 사회단체 등이 가세하여 대중운동화 하였지만 이후 이러한 한일회담에 대한 반대운동은 6월의 계엄령과 8월의 위수령에 의한 대학생검거, 휴교령 등의 일련의 조치와 야당의 분열로 인해 점차 진정 국면을 맞았다. 그리고 1964년 12월 7차 한일회담이 시작되는데, 1964년 미국의 아시아정책을 적극 지지하는 사토내각의 출현이 한일관계의 분수령이 되었고, 한일국교정상화의 최종 작업이 이루어졌다. 시나 에츠사부로 외상이 2월 17일 방한하여 20일 서울에서 한일기본조약을 가조인함으로써 타결의 길을 열었는데 당시, 시나 외상은 방한 성명에서 불행한 시기에 대한 깊이 반성하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일본정부 고관으로서는 처음으로 사죄의 발언을 하였다. 이듬해 2월 한일 양국은 서울에서